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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펑더화이에게 “미 10군단 장진호로 유인, 전멸시켜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4> 
베이징시 부녀 4만여 명이 참석한 항미원조 지지대회. 마오쩌둥 좌우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51년 1월 28일, 고궁 태화전(太和展). [사진 김명호]

베이징시 부녀 4만여 명이 참석한 항미원조 지지대회. 마오쩌둥 좌우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951년 1월 28일, 고궁 태화전(太和展). [사진 김명호]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6·25전쟁은 예외다. 무기연기나 다름없는 휴전상태로 흐지부지되다 보니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전쟁이 돼 버렸다. 장진호 전투도 양측 모두 승리를 자처했다. 승자는 따로 있었다. 아름다운 산하에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분노한 동장군(冬將軍)이 진정한 승자였다.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영하 30도 웃도는 장진호 설원에
8만 병력이 흔적조차 없이 매복

전쟁 귀신 스미스도 정보 안 믿어
항일, 국·공전쟁 맹장 쑹스룬 괄시

미군 코앞까지 가서 수류탄 던져
장진호 전투 최후 승자는 동장군

1950년 겨울, 장진호 일대는 미군과 중국 지원군의 무덤이었다. 날씨도 한몫했다. 50년 이래 최대의 혹한이었다. 영하 30도는 기본이고 40도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마오, 베이징 교외 굴에서 작전 명령  
 
중앙군사위원회에 출석, 장진호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쑹스룬. 1952년 봄, 베이징.

중앙군사위원회에 출석, 장진호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쑹스룬. 1952년 봄, 베이징.

구전되는 일화가 있다. “1950년 11월 22일, 맘 놓고 북진 중이던 미 10군단은 추수감사절 특식 칠면조를 즐기고 있었다. 장진호 서안에 와 있던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는 보급이 지연됐다. 사병들은 C레이션 박스의 소고기와 콩으로 칠면조를 대신했다. 갑자기 한파가 몰려왔다. 설사병 환자가 속출했다. 한 사병이 배 움켜쥐고 간이화장실로 달려갔다. 몇 분 후 화장실에서 비명이 요란했다. 달려가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배출 중이던 변이 변기통에 얼어 있던 변과 언 채로 연결돼 엉덩이 사이에 붙어 있었다. 군의관이 톱으로 겨우 빙분(氷糞)을 떼 냈다. 곰이나 호랑이라면 모를까, 장진호 주변은 사람 있을 곳이 못 됐다. 속으로 맥아더를 원망했다.”
 
미 해병 1사단은 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미국 최강의 부대였다. 육군 7사단과 함께 알몬드가 지휘하는 10군단에 속해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 후 바다를 통해 흥남에 상륙했다. 흥남에서 함흥을 거쳐 장진호까지는 길이 한 개밖에 없었다. 그것도 수천 년간 사람보다 야생동물이 더 오가던 꾸불꾸불한 소로였다.
 
항미원조 지원군 출병 후 마오쩌둥은 베이징 교외 굴속에 지휘부를 차렸다. 온종일 한반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부전선에서 성과를 거두자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전문으로 명령했다. “서쪽은 그 정도면 됐다. 일부만 남아서 저항하고 38·39·40·42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라. 미 10군단을 장진호 부근으로 유인해라. 동서 양쪽에서 포위해 버려라. 동쪽에 있는 9병단 산하 20군과 27군은 이미 매복에 들어갔다. 병참이 큰 문제다. 26군은 명령 있을 때까지 대기시켜라.” 펑더화이는 마오의 지령을 9병단 사령관 쑹스룬(宋時輪·송시륜)에게 전달했다.
 
장진호로 향하던 미 해병 1사단 선발대는 유리하다 생각되는 곳에 야영했다. 한밤에 소변 급해 일어난 하급지휘관이 구술을 남겼다. “주변 산세에 등골이 오싹하고 간담이 서늘했다.” 중간에 있는 5개 마을은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나 다름없었다. 가끔 중국지원군과 총격이 벌어졌지만 별것 아니었다.
 
11월 26일, 유담리(柳潭里)라는 이름 예쁜 마을에 도달할 즈음 심상치 않은 정보가 들어왔다. “6일 전 중국 지원군 3개 사단(우리의 연대 정도)이 유담리를 통과했다. 해병 1사단을 포위 중이다. 중국군 2개 군단도 매복을 완료했다.”
 
1사단장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중국사람 음흉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집히는 바가 있었다. 헬기에 올랐다. 장진호 일대와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세, 행군 중인 부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미스는 중국군이 포위를 시도할 만하다고 확신했다. 무슨 일이건 만에 하나가 문제였다. 장진호 남단 마을에 간이 비행장 건설을 요구했다. "긴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공중보급과 부상병 수송을 완비한 후에 조금씩 전진하겠다.”
 
전쟁 귀신 스미스도 중국지원군의 매복은 믿지 않았다. 영하 30도를 웃도는 엄동설한이었다. 8만에 가까운 병력이 흔적도 없이 설원에 매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10군단장 알몬드는 물론이고 최고 사령관 맥아더도 중국군이 매복했다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지원군 9병단이 미 10군단 향해 공격을 시작했을 때도 최초의 반응은 웃어넘기는 정도였다. 미군에 쫓긴 잔여부대의 소동 정도로 취급했다. 항일전쟁과 국·공전쟁의 맹장 쑹스룬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다.
  
우슈취안, 안보리서 대만 대표 비난
 
유엔 특파대사직을 마치고 귀국한 우슈취안(왼쪽 둘째). 왼쪽 첫째는 대표단 고문 차오관화. 오른쪽 첫째가 차오관화의 첫번째 부인 궁펑(龔澎). 1950년 12월 31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유엔 특파대사직을 마치고 귀국한 우슈취안(왼쪽 둘째). 왼쪽 첫째는 대표단 고문 차오관화. 오른쪽 첫째가 차오관화의 첫번째 부인 궁펑(龔澎). 1950년 12월 31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미군을 우습게 보기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펑더화이에게 이런 전문을 보낼 정도였다. "미 10군단을 전멸시켜라.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상대를 전멸시키면 우리 병사 한 명만 남아도 우리가 승리한 거다.”
 
11월 27일 새벽 제9병단의 공격이 시작됐다. 9시 15분, 미 해병대 정찰기가 황급히 보고했다. "중국군 진지가 서남부 전선과 도로 남북에 널려 있다. 해병 1사단이 포위됐다.” 28일 밤 10시 30분, 잠복해 있던 중군 지원군 제9병단 산하 20군이 미 해병 1사단에 싸움을 걸어왔다. 혈전이 벌어졌다. 지원군은 무기가 빈약했다. 낡은 박격포와 수류탄에 의존했다. 수류탄 투척거리는 30m를 넘지 못했다. 미군 코앞에 다가와 수류탄 던지고 쓰러졌다. 밤새도록 줄을 잇는 지원군의 수류탄 투척에 미군은 경악했다.
 
11월 29일, 뉴욕의 유엔 안보리 회의장은 시작부터 웅성거렸다. 미국은 중국 특파대사 우슈취안(伍修權·오수권)이 제안한 ‘미국의 조선침략’ 안건의 첫 번째 발언권을 한국대표 임병직(林炳稷)에게 안배했다. 우슈취안은 토론회 참석을 거절했다.
 
임병직의 발언이 끝나자 중화민국 대표 장팅푸(蔣廷黻·장정불)가 뒤를 이었다. 우슈취안은 중국대표단과 함께 다시 회의장에 들어갔다. 장팅푸는 자신이 중국을 대표한다며 유창한 영어로 중공을 비난했다.
 
우슈취안도 발언권을 얻었다. 장핑푸를 국민당 패잔집단의 대표라고 몰아붙였다. "저 사람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 패거리의 대표에 불과하다. 중국인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위대한 5억 인민을 대표한다는 사람이 중국어도 할 줄 모른다. 중국어는 유엔의 공식언어다. 영어로 발언하는 것은 국격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장제스 당을 대표할 뿐이다.”
 
중국대표단의 제안은 총회에서 부결됐다. 우슈취안은 분노했다.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유엔도 틀려먹었다며 장외 투쟁에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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