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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솜방망이 처벌’마저 미룬 당국에 부글부글

모니터링 체계 갖춘 선진국과 달리 감시 허술… 자본시장법상 거래 속도 제한 규정 없어

국내 증시 뒤흔든 초단타 매매


메릴린치증권의 초단타 매매 행위에 대한 제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초단타 매매는 전용회선과 알고리즘에 의존해 빠르게 주식을 사고 팔면서 작은 주가 변동에서도 시세차익을 거두는 매매 방식이다. / 사진:ⓒ gettyimagesbank

메릴린치증권의 초단타 매매 행위에 대한 제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초단타 매매는 전용회선과 알고리즘에 의존해 빠르게 주식을 사고 팔면서 작은 주가 변동에서도 시세차익을 거두는 매매 방식이다. / 사진:ⓒ gettyimagesbank

#1. 지난 2017년 주식 투자자들은 주식 호가창과 거래원을 확인하며 의문을 품었다.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가 코스피는 물론 코스닥 종목 다수에서 매수와 매도 상위를 차지하기 시작해서다. 일부 투자자들은 외국계 증권사로부터 대량의 거래 주문이 들어왔다는 점을 호재로 해석하고 동반 매수에 나섰다. 그러나 메릴린치는 대량의 매도 주문도 내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단기간 주가 등락폭이 확대됐고 투자자들은 손실을 입었다. 메릴린치의 거래 행태가 알려지면서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초단타 매매’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2. 메릴린치의 초단타 매매가 극성을 부리자 투자자들은 메릴린치증권을 ‘멸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초대형 투자은행(IB)’이라는 명성과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르게 사고 파는 매매 행태 때문이다. 이에 지난해 7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메릴린치의 초단타 매매를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9월에도 메릴린치를 제재하라는 청원이 이어졌다. 그해 연말까지 비슷한 내용의 청원은 20개나 된다.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메릴린치가 거래 상위에 이름을 올리면 매매에 얽히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졌다.
 
#3. 개인 투자자들의 원성 속에 금융당국에서는 지난해 8월 메릴린치의 단타 매매와 관련한 위법 여부 본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10월에는 한국거래소가 조사에 착수했다. 이어 한국거래소는 지난 3월 규율위원회에서 5억원 미만 수준의 회원제재금 또는 주의·경고 등 제재를 부과하기로 했다. 다만 제재 확정은 7월 시장감시위를 거쳐야 한다. 금융감독원에서는 메릴린치에 거래를 위탁한 미국 시타델 증권을 두고 자본시장법상 시세조종 금지 조항과 시장질서 교란행위 금지 조항 등 어떤 규정을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거래원에 메릴린치 뜨면 당장 피하라”
국내 증시에서 미국 등 금융 선진국에서 문제가 됐던 초단타 매매 행위가 극성을 부리면서 투자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초단타 매매는 거래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에 의존해 작은 주가 변동에도 시세차익을 거두는 매매 방식이다. 일반적인 단타 매매가 1만원에 주식을 매수한 후 당일 1만2000원에 매도해 단기 수익을 올리는 방식이라면 초단타 매매는 이익이 적더라도 1초에 수십회 주식을 사고팔면서 차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 단타 매매가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1998년 3월부터다. 한국거래소에서는 이 때부터 별도의 제한 없이 하루 동안 수차례 매수와 매도를 반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전까지는 주식 매도 후 즉시 다른 주식을 매수하는 거래는 한 번만 허용했기 때문에 단타 매매가 불가능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단타 매매의 주체는 대부분 개인투자자였다. 한국 시장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과 기관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투자 의사결정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당일매매(데이트레이딩)의 실익이 없었다. 개인투자자들은 당일 매매 비중의 90%가량을 차지했다. 매매 방식도 주가 차트를 보고 빠르게 매매를 결정하는 식으로 단순했다. 금융당국에서는 특별히 단타 매매를 제재할 필요가 없었다.
 
정보통신기술(ICT)이 발달하면서 단타 매매는 진화했다. 미국과 유럽 등 금융 선진국을 중심으로 초단타 매매가 등장했다. 초단타 매매는 수백만분의 1초 안에 다수의 거래를 내는 방식이다. 찰나의 시간 동안 매매 판단을 내리고 실행을 마치려면 고성능 컴퓨터와 전용회선이 필수적이다. 사람의 손으로 따라할 수 있는 매매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초단타 매매는 기관투자자가 주도하고 있다. 메릴린치는 여기에 속한다. 메릴린치는 미국 시타델 증권의 위탁을 받아 초단타 매매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시타델 증권은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매매로 이름난 헤지펀드다. 명성에 걸맞게 알고리즘을 활용해 매수 후 주가가 1~2%만 상승해도 빠르게 보유 주식을 팔아치우는 형식의 주문을 냈다. 메릴린치는 자사 DMA(Direct Market Access, 직접주문전용회선) 시스템을 통해 초단타 매매 거래를 수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매매했던 종목은 1000여 개가 넘는다. 6월 말 기준으로 코스피 상장 종목이 789개, 코스닥 상장 종목은 1344개로 모두 2133개다. 국내 증시 상장 종목 가운데 절반이 초단타 매매 대상에 포함된 셈이다. 특히 코스닥 종목은 상대적으로 시가총액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일부 종목에서는 1~2분 사이에 당일 거래량의 20%에 가까운 물량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기도 했다. 대규모 물량에서 빠르게 손바뀜이 일어나다 보니 주가 변동성이 극대화됐다. 주가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는 고성능 컴퓨터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용회선인 DMA를 활용하기 때문에 거래 체결 속도에서도 개인투자자가 따라갈 수 없었다. 메릴린치가 나타나면 피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2분 안에 당일 거래량 20% 물량 내놓기도
DMA는 일종의 전용회선으로 개인투자자들이 빌려서 사용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이미 2010년대부터 일반 거래보다 알고리즘 거래 비중이 커진 미국 시장에서는 개인투자자가 현재 시세로 주식을 매수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지수가 폭락하는 사례도 잦아졌다. 더구나 전용회선과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은 개인 투자자와 출발선이 달랐다.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초단타 매매로 의심되는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자료 보존과 정보보고 등 사전 감시를 강화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2010년 규제당국의 인가를 받지 않은 초단타 매매자들의 거래를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초단타 매매가 의심되는 기관들에게 좀 더 상세한 주문 내역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규제 방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시기별·회선별 주문 내역을 모두 포함한다. 유럽에서는 초단타 매매 전략을 사용하는 금융회사에 주문 내용은 물론 취소 내역도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도 지난 2017년 알고리즘 초단타 매매 행위자의 거래기록을 보존하는 내용의 규정을 도입했다. 발빠르게 대응책을 마련한 금융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아직 초단타 매매를 겨냥한 규제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초단타 매매 거래의 두 축인 거래 속도와 알고리즘 가운데 거래 속도에 관해서는 자본시장법상 규정이 없다. 실제로 전용회선인 DMA를 활용한 초단타 매매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식시장이 아닌 파생상품시장으로 시야를 넓혀 보면 지난 2009년 발생한 ELW(주식워런트증권) 초단타 매매 사건이 있다. 당시에는 ELW 초단타 매매 알고리즘을 증권사 내부 서버에 직접 연결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진행했다. 이 방식으로 2009년 1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벌어들인 수익은 약 5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 DMA 활용과 관련된 부분은 지난 2014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감독기관이 사실상 속도 편의 제공 서비스를 허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피고인들의 경우 다른 개인 투자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모든 거래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거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거래가 자본시장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초단타 매매의 또 다른 축인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장 자율에 맡기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업무규정을 통해 알고리즘 거래 설계 때 공정거래질서를 저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금융당국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거래 내역을 확인하다 보니 사실상 무주공산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단 국내 법에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수만번 거래를 하는 등 과도하고 비정상적인 거래 방식에 대해서만 들여다보고 있다”며 “대부분의 증권사들도 자체적으로 내부규정을 마련해 비정상적인 거래를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용회선과 알고리즘 등 초단타 매매 핵심 요소의 위법성을 가를 기준이 없다 보니 메릴린치와 시타델 증권 등에 제재가 부과되더라도 피해를 입은 개인투자자들이 만족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일단 한국거래소 제재는 시장 자율 규제기 때문에 처벌 수준이 제한적이다. 거래소가 제시할 수 있는 조치는 회원사 제명이나 회원자격 정지, 매매거래 정지, 회원 제재금 부과(최대 10억원) 등이다. 일각에서는 이 정도 제재로는 메릴린치가 이번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에 비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마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제재를 확정할 한국거래소시장감시위원회에서는 메릴린치에 한 차례 더 소명기회를 주기로 하고 결정을 보류했다.
 
시장 자율 규제가 아닌 자본시장법상 초단타 매매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176조 시세조종 금지 조항과 178조 2항 시장질서 교란행위 금지 조항 정도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이익의 1.5배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증권선물위원회에서는 지난 2016년 초단타 매매를 통해 이익을 냈던 개인투자자에 대해 375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증선위에 따르면 이 투자자는 지난 2016년 9월 13일부터 한 달여간 주식 2종목에서만 88만254주를 매수하고 89만9549주를 매도했다. 이 투자자는 평균 2~3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고가의 단주 주문을 수백회 제출하는 방식으로 다른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한 사실이 인정됐다.
 
알고리즘 활용, 시세조종 의도 입증 어려워
메릴린치 창구를 통해 진행된 초단타 매매 거래에서는 현재 가격보다 미세하게 높은 호가로 대량 매수 주문을 내고 이후 주가가 오르면 보유 주식을 매도하고, 반대로 미세하게 낮은 호가로 대량 매도 주문을 낸 후 가격이 내리면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시세조종 혐의로 처벌 받은 개인투자자와 다를 것 없는 방식이다. 그러나 메릴린치에도 같은 조항을 적용해 처벌하기 위해서는 시타델 증권이 특정 주식의 시세를 조종하려 했다는 의도를 확인해야 한다. 시타델 증권의 알고리즘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Buy Low And Sell High) 주식시장의 기본적인 매매 전략만 담았다면 시세조종 의도가 없어 처벌이 쉽지 않다.
 
윤동인 금융감독원 특별조사국장은 “거래량이 1만주인 종목과 100만주인 종목을 동일한 잣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종목별로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을 다 봐야 한다“며 ”어떤 사례는 처벌받고 어떤 사례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해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고 핵심은 조사를 하는 사람의 몫“이라며 말을 아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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