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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을수록 구수한 향, 은은한 단맛…우리밀 빵의 유혹

이택희의 맛따라기
이성규 대표와 황진웅 토종농부가 우리 땅에서 재배한 여러 가지 밀로 구운 ‘아쥬드블레’의 빵들. 맛이 달고 기름진 것보다 밀가루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린 식사용 빵이 대부분이다. [신인섭 기자]

이성규 대표와 황진웅 토종농부가 우리 땅에서 재배한 여러 가지 밀로 구운 ‘아쥬드블레’의 빵들. 맛이 달고 기름진 것보다 밀가루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린 식사용 빵이 대부분이다. [신인섭 기자]

사람보다 그가 만든 빵을 먼저 만났다. 지난여름에 간 순환농업 행사장엔 자리마다 단팥빵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이런 빵이 입에서는 좋아도 속은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 한쪽으로 밀어 뒀는데 쉬는 시간에 빵 먹는 사람들 표정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평소 먹던 빵과 달랐다. 쫄깃하고 부드럽고 입에 감기는 편안한 맛이다. 묵직한 팥소는 통팥이 툭툭 씹혔다. 단맛도 지나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속이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 땅에서 난 밀과 팥으로 만든 빵이다. 밀은 전동 맷돌제분기로 갈고, 팥도 직접 삶아 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며칠 후 그 단팥빵을 사러 갔다. 점심 무렵인데 다 팔리고 주인공도 없었다.
 
포장판매만 하는 작은 빵집이었다. 너비 2m쯤의 아담한 진열장엔 달거나 기름진 빵은 없고 반죽만 빚어 구운 빵이 대부분이다. 빵마다 밀 품종과 생산지를 표시했다. 진열장 위에는 7가지 토종밀·고대밀의 이삭과 알갱이를 유리병에 담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전시했다.
 
이성규(왼쪽)·황진웅씨가 충남 공주 밀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신인섭 기자]

이성규(왼쪽)·황진웅씨가 충남 공주 밀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신인섭 기자]

우리 밀로 구운 캄파뉴(시골빵)와 뤼스티크(거친 빵)를 한 덩이씩 샀다. 프랑스 농촌에서 식사용으로 흔히 먹는다는 빵이다. 반죽은 밀가루·소금·물·사워도우(물과 밀가루로 자가배양한 효모·유산균)만 넣어 저온에서 20시간 장기 숙성한다. 20시간은 보통 빵과 비교해 아주 긴 시간이다.
 
봉긋한 빵 표면은 딱딱해 손톱으로 긁으면 드드득 소리가 났다. 잘라서 먹으니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게 맛이 새로웠다. 밀기울이 섞인 통밀가루 빵이라 처음엔 거친 듯하지만, 꼭꼭 씹으면 구수한 향이 피어났다.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고였다.
 
빵을 만든 사람과 그가 키우는 밀에 관심이 갔다. 지난 2월 그가 수집하고 증식해 국내 전문가에게 보내 재배한 국내외 6가지 토종밀·고대밀·육종밀로 만든 사워도우 캄파뉴 설명회와 비교 시식회가 열렸다. 단일품종 밀가루로 같은 조건에서 구운 빵인데 모양·맛·질감이 다 달랐다. 미세하지만 현란한 차이와 변화가 놀라웠다.
 
놀랍기는 빵을 만든 사람이 더했다. 우리 밀을 연구하고 우리 밀에 맞는 빵을 개발·교육하려고 ‘우리밀연구소’와 제빵교실 ‘더베이킹랩’을 운영하는 이성규(46) 제빵사다. 그는 “공부는 자신 있다. 고교 3년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했다. 서울대 공대와 대학원을 나와 중국에서 MBA를 마치고 국내 자동차부품회사의 한·중 합자회사 베이징 법인장(CEO)으로 5~6년 전 연봉 2억원을 받던 사람이다.
 
밀 종류

밀 종류

빵에 빠져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빵을 공부하면서 만난 제빵교실 동기와 2017년 말 ‘아쥬드블레(ÂGE DE BLÉ)’라는 빵집을 냈다. 곡물(밀)의 시대라는 뜻이다(얼마 전 동업 정리). 빵에 빠질수록 밀의 중요성이 제빵사를 압도했다. 저절로 밀에 미치게 됐다.
 
건강한 식품과 그 재료를 생산하는 농업에 대해 공부하면서 두 개의 키워드를 찾았다. 로컬푸드·슬로푸드. 우리 땅에서 자연의 원리를 좇아 작물을 재배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사람도 살고, 농업도 산다는 깨달음이다.
 
그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데 시중에서 빵을 사 먹으면 속이 불편했다. 밀가루 자체의 결함과 각종 화학첨가제가 원인이었다. 그런 문제가 없도록 로컬푸드, 즉 우리 밀로 빵을 직접 구워 먹기로 했다.
 
우리 밀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청주·괴산·공주·구례·보성·진주 등지에서 밀 농가를 만났다. 밀을 구해 2014년부터 홈베이킹을 했다. 어느 곳 밀은 빵이 잘되고 어느 곳은 안 됐다. 품종에 따라서도 달랐다. 토종 앉은뱅이밀이 풍미가 좋았다. 그 과정에서 공주 계룡면의 토종농부 황진웅(57)씨를 만났다. 그가 재배한 밀로 빵을 구우니 잘됐다.
 
여러 곳에서 빵을 배웠지만, 빵에 가장 중요한 밀가루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다. 우리 밀에 관해 물으면 ‘우리 밀은 빵이 안 된다’ ‘우리 밀 빵은 맛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실제 해보니 상업적 가치가 있는 빵이 나왔다. 앉은뱅이밀은 빵이 잘 부풀고 맛도 있었다. 또, 우리 밀이 정말 빵에 안 맞으면 빵이 잘되고 맛도 있는 종자를 들여와 밀을 생산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토종밀·고대밀에 대한 관심과 재배가 늘고 있었다. 2015년 유럽과 미국·캐나다에서 주목받는 밀 종자 8가지를 들여와 그의 고향 충남 청양에서 3년간 증식했다. 2017년 가을 공주의 황씨에게 일부를 보내 재배면적을 늘렸다.
 
두 사람이 올해는 토종밀인 앉은뱅이밀(한국)·레드 파이프(캐나다)·보르도 레드(프랑스)와 고대밀 스펠트(유럽·이집트)를 논밭 2만㎡(약 6000평)에 재배해 6~7t의 밀 소출 기대하고 있다. 면적은 앉은뱅이밀이 70%이다.
 
지난달 10일 토종농부 황씨가 사는 공주시 계룡면 봉명리 마을회관에서 밀 수확제가 열렸다. 품종마다 익는 때가 달라 앉은뱅이밀만 일부 수확했다. 30여 명이 참석해 4가지 재배 밀로 구운 캄파뉴로 점심을 먹었다. 이 자리에서 이 제빵사의 생각을 들어봤다.
 
어떤 빵이 좋은 빵인가.
“우리 땅에서 난 밀 품종 특유의 향과 풍미가 살아있는 로컬푸드 빵, 천천히 천연 발효해 향이 좋고 소화흡수가 잘돼 속이 편한 슬로푸드 빵이다. 그 다음엔 빵을 굽는 동안 밀가루의 당분과 단백질이 변성해 표면이 갈색으로 변할 때 생성되는 2차 풍미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마이야르 반응이 중요하다. 빵의 종류별 특징을 제대로 살리고, 모양도 잘 만드는 제빵기술도 필요하다.”
 
본인은 어디쯤 왔나.
“아직 멀었다. 발효와 밀의 세계는 무궁무진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평생 해도 부족하다. 상업용 이스트가 아닌 사워도우 빵은 원하는 맛과 아직 거리가 멀다.”
 
어떤 사람들이 이 빵을 주로 사 먹나.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장년층이다. 그런 맛을 좋아하려면 어느 정도 연륜이 필요하다. 젊은 사람들은 거친 음식 안 좋아한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듣지는 않나. (이 질문에 그는 휴대전화에서 에머슨의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시를 꺼내 다음 대목을 읽으며 ‘내가 사는 이유’라고 했다.)
“한 뙈기 정원을 가꾸든 /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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