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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준의 의학노트] 청진기여, 부디 영원하라!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1816년 가을, 무대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궁전의 뜰이다. 한 아이가 둥근 나무 막대 한쪽 끝을 핀으로 긁으면 다른 아이는 반대쪽 끝을 귀에 대고 막대를 통해 전달된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젊은 의사가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그는 바로 당시 세계 의학계의 대세였던 파리 임상학파의 총아 ‘르네 라에네크’(사진)다. 얼마 후 라에네크는 온몸이 퉁퉁 부은 젊은 여자 환자를 진찰하게 되는데 불현듯 아이들이 나무 막대를 가지고 놀던 모습이 떠올라 종이 한 장을 둥글게 말아 한쪽 끝을 환자의 가슴에 댄 후 반대쪽 끝에 자신의 귀를 대고 들어보았다. 놀랍게도 환자의 가슴에 직접 귀를 대었을 때보다 심장 박동이 훨씬 선명하게 들렸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라에네크는 최초의 청진기를 고안해낸다.
 
청진기를 고안한 프랑스의 의사 르네 라에네크 (1781-1826). 기관지확장증, 폐기종, 기흉 등의 폐질환을 정확히 진단해낼 수 있는 최초의 의사였던 그는 마흔 다섯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Rene-Theophile-Hyacinthe_Laennec

청진기를 고안한 프랑스의 의사 르네 라에네크 (1781-1826). 기관지확장증, 폐기종, 기흉 등의 폐질환을 정확히 진단해낼 수 있는 최초의 의사였던 그는 마흔 다섯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Rene-Theophile-Hyacinthe_Laennec

이후 청진기는 빠르게 보급되는데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는 의학적인 이점에 더하여, 청진기를 사용하면 그 길이만큼 여자 환자의 몸에서 물러설 수 있어서 유용했다. 또한 위생이 나쁜 환자의 몸에 직접 귀를 대지 않을 수 있어 의사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의사의 상징이 된 청진기는 지금도 물론 자주 사용된다. 잘 훈련된 의사라면 청진기를 통해 찬찬히 듣는 것으로 아이의 천식이 도진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며, 갑자기 숨이 차다고 병원을 찾은 대학생의 폐가 짜부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걷는 것이 예전만 못하다는 교장 선생님의 폐가 굳어간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들이 청진기를 통해 환자의 소리를 아무리 주의 깊게 들어봐도 기계를 이용한 검사의 정확성을 따라갈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컴퓨터 단층 촬영(CT)이 제공하는 정보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며, 우리가 흔히 ‘가슴 X선 촬영’이라고 부르는 간단한 검사조차 대가의 청진기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젊은 의사들일수록 청진기에 덜 의지하며, 중견 의사들의 청진도 의례적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환자들 역시 숨소리가 어떤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방금 촬영한 X선 사진이 괜찮으냐고 묻는다. 결국 청진기를 귀에 꽂고 환자의 폐와 심장이, 그리고 대장과 소장이 내는 소리를 듣는 일은 점점 형식적인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의사가 하는 일의 상징이었던 청진이 이제 의사는 불신하고, 환자는 무관심하며, 보험공단은 값을 매겨주지 않는 잉여 의료 행위가 된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계들이 생겨나는 세상이다. ‘딥 블루’라는 이름의 컴퓨터가 체스 챔피언을 이겨버린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고, 바둑 챔피언도 결국 ‘알파 고’에게 무릎을 꿇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진료도 의사가 아닌 인공지능이 담당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환자의 소리를 의사의 귀까지 전달하는 단순한 아날로그 기구인 청진기가 용도 폐기될 날이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의 귀를 확실히 이겨버린 다음에도 의사들은 늘 청진기를 환자의 몸에 대고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신을 찾은 환자의 몸에 청진기를 대고 직접 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의사와 환자가 서로 공감과 신뢰를 나누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건 세계 챔피언이 컴퓨터에 맥없이 졌음에도 인류가 지금도 바둑과 체스를 통해 서로 친해지고 정을 나누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청진기여, 부디 영원하라!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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