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김현기의 시시각각] 워싱턴을 떠나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 트럼프 대통령님. 4년 전이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하는 비행기 안에서 당신이 출마를 선언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시쳇말로 빵 터졌습니다. “참나, 별일이 다 있네…” 했습니다. 제 착각이었습니다. 전국의 유세장에서 ‘트럼프!’를 외치는 청중들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제 비웃음을 반성했습니다. 오바마 8년 동안 쌓인 미 사회 주류의 피로감과 분노를 접하며 제 무지를 반성했습니다. 미국은 분명 변하고 있었습니다.
 
특파원 생활 4년을 당신과 함께했습니다. 아니 ‘당신에 시달렸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네요. 하루 일과가 새벽 6시 당신의 ‘폭풍 트윗’을 기다리는 일부터 시작됐으니까요.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당신의 ‘빅 마우스’에 저도, 회사의 데스크도, 한국도, 전 세계도 놀란 4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성도 생겼답니다. 이제는 당신의 허풍과 과장의 50% 정도는 과감히 잘라내고 상황을 예측하는 식견이라 할까 요령은 생겼으니까요.  
 
물론 방심은 금물입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니 내년 대선에서 당신이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54%라고 합니다. 관용과 다양성의 존중이란 미국의 기존 가치를 이렇게 무너뜨렸음에도 54%나 되는 게 놀랍고, 경제가 이렇게 좋은데 54%밖에 안 되는 게 또 놀랍습니다. 1년 전 싱가포르 기자회견장에서 “한미연합훈련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워 게임(war game·전쟁놀이)이다. 매우 부적절하고 매우 도발적이다”라고 하셨죠. 현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60년 한미동맹의 근간을 그렇게 단칼에 부정한 대통령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부디 그런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2 키신저 전 국무장관님. 지난주 백악관 옆 헤이아담스 호텔에서 뵐 기회를 얻어 영광이었습니다. 만 96세 고령에도 힘차게 양고기를 칼질하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된 건) 불행하게도 미 법률에 ‘이민 1세대(키신저는 독일 태생)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못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는 당신의 자신감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게 한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오”란 농담을 하셨죠. 실제 당신은 외교의 황제였습니다. 베트남전을 마무리 짓고, 중국과 수교를 맺고, 소련과 전략무기 감축 협상을 끌어내고, 중동 분쟁을 해결했죠. “내가 미국에 ‘진짜 외교’를 가르쳐줬다”고 자평하실 만합니다.  
 
하지만 궁금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비전은 뭔지, 아니 비전이 있기는 한 건지. 또 트럼프에 수시로 폭넓게 외교 자문을 한다고 하시는데, 그 결과가 고작 고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미국 우선주의’인 건지. 당신은 그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습니다.  
 
그 미소의 의미가 과연 뭘까요. 당신이 제게 던져 준 어려운 숙제 같습니다.
 
#3 이 칼럼이 게재될 때쯤이면 전 서울로 귀임하는 상공에 있을 겁니다. 4년의 미국 생활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한마디로 규정하긴 힘들 겁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낀 건 미국은 사람보단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란 점입니다. 더디지만 믿음이 갑니다. 사람이 잘못해도 시스템이 바로 잡습니다. 국민이 열화(劣化)해도 미국이란 시스템이 진화를 시킵니다. 축적의 힘입니다. 저변이 넓으니 여러 목소리를 수용하는 자세가 돼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하건, 자기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말 첫마디를 “매우 좋은 포인트(질문)야!”로 시작합니다. 인정의 힘입니다. 우리에겐 없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저력입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4년 전 워싱턴 부임 직후 몇몇 ‘비 매너’를 접하곤 정나미가 떨어져 ‘미국이 선진국 맞나요?’란 칼럼을 모질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바로잡고 갑니다. 시스템의 선진국이 맞았습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