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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6·25 서울 점령 北탱크부대···서울대병원서 900명 학살

올해로 6·25전쟁이 69주년을 맞았다. 기억이 희미해지기에 충분할 정도로 긴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용서할 게 있다면 용서하되, 결코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서울대병원에 자리 잡고 있는 6.25 희생자 추념 현충탑 (일면이름모를 자유전사비)의모습. 사진 채인택

서울대병원에 자리 잡고 있는 6.25 희생자 추념 현충탑 (일면이름모를 자유전사비)의모습. 사진 채인택

국가보훈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서울대병원에서 벌어졌던 부상 국군 장병 학살 사건이다. 현장을 찾아봤다. 창경궁과 길 하나 사이에 있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쪽 통로를 통해 병원 구내에 들어서니 야트막한 언덕에 하얀 비가 하나 서 있다. 왼쪽에 ‘현충탑’이라고 크게 쓰고 오른쪽에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라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1950년 6월 28일 이곳에서 벌어진 비극을 추념하는 시설물이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 연혁’과 서울대병원에 설치된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 설명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이렇게 진행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파죽지세로 남하해 서울의 최후 방어선인 미아리 고개를 돌파해 창경궁 앞까지 이르렀다. 창경궁에서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거의 1000명에 이르는 부상 장병이 몰려 있었다. 부상 장병은 응급실, 입원실, 수술실은 물론 병원 복도까지 가득 차 있었다. 당시 전세 악화로 서울이 함락 직전이었지만 병원 내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피란을 단념하고 오로지 치료에 전념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기갑 부대. 1950년대 북한에서 발행한 책에서 발췌했다.[중앙포토]>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기갑 부대. 1950년대 북한에서 발행한 책에서 발췌했다.[중앙포토]>

 
당시 병원에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육군본부 병참본부 소속 조용일 소령과 남 소위가 지휘하는 국군 1개 경비 소대 병력이 남아있었다. 6월 28일 새벽, 북한군 1개 대대가 공격을 가해 병원 주위를 지키던 국군 경비 소대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작은 동산이던 서울대 병원을 지키던 국군은 필사적으로 버티다  조용일 소령과 소대장 남 소위, 그리고 선임 하사인 민 하사와 나머지 소대원이 전원 전사했다. 동산이 함락되자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은 국군 부상 장병과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일반 환자를 포함한 900여 명을 학살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63년 6월 6일 한 언론인의 주도로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를 건립해 오늘에 이른다. 1980년대에 현충탑이라는 표식이 더해진 이 비는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시설(관리번호 11-2-03)로 지정됐다.
국문과 영문으로 적힌 ‘이름 모를 자유 전사비’ 안내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고 병원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이름 모를 자유전사들, 그리고 환자와 그 가족들의 영령 앞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1963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이름 모를 자유 전사비’를 건립하여 님들에게 바칩니다.”  
서울대병원에 설치된 이름모를 자유전사비의 설명문. 사진 채인택

서울대병원에 설치된 이름모를 자유전사비의 설명문. 사진 채인택

 
서울북부보훈지청에 따르면 2013년까지 서울대학교병원(6월 5일)과 종로구 보훈단체(6월 28일)가 각각 실시하던 행사를 통합해 서울대학교와 종로구 보훈 단체, 그리고 서울북부보훈지청이 합동으로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학살 당일인 28일에 합동 행사를 치른다.  
 
지난해 서울대병원 현충탑 앞에서 열린 추념식의 모습. [서울대 병원 제공]

지난해 서울대병원 현충탑 앞에서 열린 추념식의 모습. [서울대 병원 제공]

국방부 발간 『한국전쟁사』 중 서울대학교 병원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100여 명의 아군 환자가 수용돼 있었는데 28일 새벽에 적이 시내로 들어오자 이들을 저지하다 모두 전사했다. 지휘관은 중령이라고 하는데 누군지 알 길이 없다. 적병들은 병실에 마구 난입해 부상 환자들에게 총으로 난사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이 가운데는 시민도 끼어 있었는데 구별조차 하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서울대병원에 쌓여 부패해가던 희생자의 시신은 창경궁 앞 도로로 옮겨져 길거리에서 소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사』 에 적힌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적에 맞서다 전사한 국군 장병과 희생자가 누구인지조차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임에도 공식 명칭도 없고 정확한 희생자 명단은 물론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대전에 진입하는 북한군 3사단.105땅크여단의 땅크연대를 배속 받아 기동력을 갖췄다. [중앙포토] .

6.25전쟁 당시 대전에 진입하는 북한군 3사단.105땅크여단의 땅크연대를 배속 받아 기동력을 갖췄다. [중앙포토] .

 
연구 부족으로 진상 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어서 조사와 연구에 어려움이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진상 규명이 없이는 역사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내년 6·25전쟁 발발 70주년, 서울대병원 학살 70주년을 앞두고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상을 규명하고 교과서에 크게 싣고 군의 정훈 교재로 활용하면서 후대에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는 노력도 필요하다.  
포로 학살은 반인류적이고 반인도적인 전쟁 범죄에 속한다. 이를 규명하고 책임자를 색출하는 일은 말 그대로 인도주의적인 ‘정의실현’이다. 전시에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선 인도주의에 대한 국제적인 원칙과 국제법에 어긋나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로 본다. 1864~1949년 4개의 협약이 마련되고 국제적으로 조인돼 인도주의에 대한 국제법의 기초가 되는 제네바 협약은 제3조는 이를 분명히 금지하고 있다.  
제네바 협약은 포로에 대한 대우를 이렇게 규정한다. “그들은 충돌 당사자에 의하여 성별· 인종·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 없이 인도적으로 대우되고 또한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을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고의로 치료나 간호를 제공 받음이 없이 방치되어서는 아니 되며 또한 전염병이나 감염에 그들을 노출하는 상태도 조성되어서는 아니 된다.” 아울러 적 부상병을 간호했다고 해서 박해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의 현충탑(이름모를 자유전사비) 사진 채인택

서울대병원의 현충탑(이름모를 자유전사비) 사진 채인택

대한제국(1897~1910년)은 1903년에 제네바협약 중 1864년 마련된 1차 협약에 가입했다. 1차협약에는 포로와 부상병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칙이 명시돼 있다. 대한적십자사의 ‘제네바협약 100문 100답’에 따르면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당시엔 대한민국과 유엔, 유엔 결의에 의한 16개 참전국, 그리고 북한은 제네바협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1950년 7월 12일 유엔군 사령관은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작전하겠다고 선언했고, 같은 해 7월 12일 북한 외교부장은 제네바협약의 원칙에 따라 포로를 대우하겠다는 통보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이런 쌍방의 선언에 따라 6·25전쟁에 제네바 협약은 공식 적용됐다. 
게다가 전시 포로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는 협약 가입과는 별개로,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국제적인 관습법인 셈이다. 이는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항을 어길 경우 전범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대병원의 현재 모습[중앙포토]

서울대병원의 현재 모습[중앙포토]

서울대병원에서 국군 부상병을 학살한 주체는 누구일까. 정확한 주체를 알려면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정황으로 미뤄 짐작하면 당시 서울에 첫 입성한 북한군 기갑부대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북한군에서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했던 부대는 105땅크여단 소속으로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에 각각 배속됐던 107땅크연대와109땅크연대였다. 이들은 의정부와 창동, 미아리 고개를 거쳐 서울 창경궁 쪽으로 진입했다. 땅크는 북한에서 전차를 가리키는 군사용어로 러시아어(танк)에서 왔다.  
당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수상은 서울을 점령한 공로를 인정해 7월 5일 105땅크여단에 ‘서울’ 칭호를 수여했다. 이어 7월 2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 부대에 ‘근위대’ 칭호를 붙여주는 정령 제54호를 발령했다. 이 부대는 사단으로 승격까지 해 명칭이 ‘근위 서울 제105 땅크사단’이 됐다. 2001년 5월 23일에는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명령으로 서울 점령 당시 여단장이던 류경수(1915~1958년)의 공적을 기려 부대 이름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그래서 그 뒤로 이 부대는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으로 불린다. 류경수는 김일성과 함께 하바롭스크 인근의 소련군 88극동여단에서 소련군 중위로 근무하다 함께 북한으로 귀국한 인연이 있다. 한때 동서였다는 설도 있다.  
북한은 2015년 평양에서 류경수 탄생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를 개최했고, 2018년 11월 19일 그의 60주기 때는 “대대손손 따라 배우자”라는 기사를 노동신문에 게재하는 등 그를 영웅시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7년 노병 대회에서 류경수의 부인인 황순희(당시 99세) 조선혁명박물관장을 살갑게 안는 장면을 보이기도 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가 서울을 점령한 류경수를 치켜세운 셈이다.  
지난해 북한의 전국노병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시 99세인 빨치산 출신 황순희 조선혁명박물관장을 만나고 있다. 황순희는 6.25전쟁 당시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105땅크여단을 지휘했던 류경수의 부인이다. [서울=연합뉴스]

지난해 북한의 전국노병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시 99세인 빨치산 출신 황순희 조선혁명박물관장을 만나고 있다. 황순희는 6.25전쟁 당시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105땅크여단을 지휘했던 류경수의 부인이다. [서울=연합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상세한 조사를 통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역사 자료를 보관하고 끝없이 계속 기억해야 한다.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륜적 범죄는 일반적인 범죄와 달리 공소 시효가 없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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