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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해법 없는 한·일 갈등의 해법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한국 없는 일본’, ‘일본 없는 한국’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얘기들을 많이 해요.” 동아시아연구원(EAI) 이사장을 맡은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가 기자에게 전한 일본 국제정치학계의 최근 분위기다. “한국과 같이 가느니 차라리 중국과 같이 가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 교수는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없고, 일본이 반성할 수 없는 이상 한·일 갈등은 결코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어쩌면 미·중 갈등보다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 간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없는 해법 굳이 찾으려 하기보다
현 상태서 동결 및 유예 선언한 뒤
세월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이번 주 일본을 방문하지만, ‘빈손 방일(訪日)’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의장국인 일본의 아베 총리는 꽉 찬 일정을 핑계로 문 대통령과의 별도 회담에 난색을 보였다. 회의장에서 오다가다 조우하는 형식으로 잠깐 볼 수 있을진 몰라도 따로 시간을 내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끝까지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현재로썬 불발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외국에 가서 그 나라 정상을 못 만나고 오는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데 이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한국 대법원이 최종적인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 관계에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한·일 관계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생겼는데도 양국 정부는 네 탓 공방을 벌이며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끝까지 가보자는 분위기이고, 아베 정부는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한국 정부와는 말도 섞기 싫다며 대놓고 한국을 ‘패싱’하는 분위기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시정연설 때만 해도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한·일 협력관계를 심화시켜 가겠다”고 했지만, 올해 연설에서는 아예 한·일 관계에 관한 언급을 생략했다. 노골적 무시 전략이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의 맹점에 기인한다. 과거사에 대한 현격한 인식 차를 양국은 서로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봉합하고, 일본의 침략과 지배, 사죄와 반성을 명시하지 않은 반쪽짜리 조약문에 서명했다. 5억 달러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일본에 대한 한국 국민의 재산·권리·이익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의 청구권 협정에도 도장을 찍었다. 당시로선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졸속합의에서 잉태된 불씨는 두고두고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며 문제가 된 일본 기업은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최종판결했다. 그에 따라 법원이 압류한 일본제철의 한국 내 관련 회사 주식의 매각이 실제 집행되면 일본 정부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본의 각종 보복 조치가 현실화할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과 개인 등 민간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곧 터질 시한폭탄을 앞에 두고도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분립(三權分立)’ 원칙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한·일 간 인적교류는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다. 754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했고, 295만 명의 일본인이 한국을 찾았다. 양국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 민간 교류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중 갈등의 불똥이 한국 기업들로 튀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갈등의 여파까지 겹치면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지난주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14대(代) 심수관’ 부음 기사를 읽다가 한 대목에서 눈길이 멎었다. 심수관가(家)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붙잡혀 규슈 남쪽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 심당길과 그 후손들이 4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도예 가문이다. 그는 1974년 방한 당시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크긴 하지만)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 앞에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우리의 자화상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일 관계가 올스톱 될 경우 손해가 큰 쪽은 우리다. 양국의 불행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사실 해법이 없다. 없는 해결책을 굳이 찾으려고 헛심을 쓰며 싸울 게 아니라 현 상태에서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의 동결 및 무기한 유예를 양국이 선언하면 어떨까. 보자기에 싸서 선반에 올려놓자는 얘기다. 이 문제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거론하지 않으면서 정상적인 이웃 나라로 지내보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선반에 하얗게 먼지가 싸일 만큼의 세월이 지나면 문제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일 지도자와 의회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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