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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잔소리 참기 힘들다? 은퇴가정의 권력이동 인정해야

기자
박영재 사진 박영재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48)
출근 시간 직장인들의 모습. 대부분의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차근차근 '승진 계단'을 밟으며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 김명섭(57) 씨는 쉼 없이 달려오다 지난해 퇴직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기로 했지만, 쉬는 것도 돈이 들고 그렇다 보니 아내 눈치를 보게 됐다. [중앙포토]

출근 시간 직장인들의 모습. 대부분의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차근차근 '승진 계단'을 밟으며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 김명섭(57) 씨는 쉼 없이 달려오다 지난해 퇴직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기로 했지만, 쉬는 것도 돈이 들고 그렇다 보니 아내 눈치를 보게 됐다. [중앙포토]

 
김명섭(57) 씨는 중견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퇴직했다. 재취업도 생각했으나 아이들은 대학 졸업 후 취업했고,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을 해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고용할만한 회사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0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만 했기에 지친 몸을 쉬게 하자는 생각을 했다. 평소 등산을 좋아한 그는 한국 100대 명산 등반을 목표로 세웠고, 좋아하는 사진도 찍고, 맛집도 찾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그만뒀다.
 
고기가 아무리 좋아도 끼니때마다 먹으면 질리는 법이다. 이도 그렇지만, 같이 갈 친구도 없고 생각보다 비용도 많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용돈을 타 쓰게 되는데 은근히 눈치를 보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가능하면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
 
집에만 있다 보니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이 눈에 띄는지…. 물컵에는 고춧가루가 묻어 있고, 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고, 냉장고 안에는 어묵이 말라 비틀어져 있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한마디 하니 처음에는 미안해하던 아내가 도리어 화를 내는 게 아닌가. 그때마다 ‘아니, 내가 돈 벌지 못한다고 무시하는구나’하는 자격지심이 생긴다.
 
아내의 잔소리에 쌓이는 스트레스
그런 나날을 보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집에서는 자신이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특별히 잘하는 요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탁기는 어떻게 돌리는지 모른다. 아내와 아이들은 TV에서 영화도 구매해 시청하지만, 자신은 리모컨으로 채널만 돌리는 정도다.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앉아 TV만 시청하고 있는데, 자신이 잉여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담배로 시름을 달래려 하면 어김없이 “그깟 담배 하나 못 끊는 위인이냐”는 아내의 ‘독설’이 귓전을 때리곤 한다. 맞받으면 싸움이 되니 물러서야 한다.
 
가족과의 갈등이 깊어진 김 씨는 결국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하지만 밖에서 먹는 술값이 만만치 않아 집에서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중앙포토]

가족과의 갈등이 깊어진 김 씨는 결국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하지만 밖에서 먹는 술값이 만만치 않아 집에서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중앙포토]

 
문을 쾅 닫고 빠져나와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들이켠다. 하지만 포장마차 소줏값도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 소주를 사다 집에서 마신다. 당연히 아내는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술만 퍼마신다”고 쏘아대고, 그 잔소리를 피하려 소주를 숨겨놓고선 몰래 한잔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 마음은 무겁고 생활은 불규칙해져서인지 언제부턴가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잘되지 않는다. 이 걱정, 저 걱정하다 보면 잠이 오지 않아 밤이 두려울 지경이다.
 
만성피로에 무기력해져 가는 자신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고민스러운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김 씨는 그런 나날이 지겹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더욱 두려운 것은 100세 시대라 앞으로도 30년 또는 40년간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퇴직 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직장 동료나 업무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휴일도 편히 쉬지 못하고 업무와 관련된 모임이나 활동에 열중했다. 하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퇴직하면서 모든 것의 기본인 일이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홀가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다. 심하면 번아웃(Burnout) 증후군을 겪기도 한다.
 
두 번째는 변화한 관계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다. 가정은 과거 가부장적 관계에서 이제는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다. 이제는 아내가 요리하면 남편은 다른 집안일을 해야 한다. 밀레니얼 세대인 자녀들은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며, 자존감이 강하다.
 
퇴직 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한 가족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다. 사진은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 극중 등장인물인 차민혁(왼쪽에서 두 번째)은 수직적인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가족들은 결국 이런 모습에 폭발하고 만다. [사진 JTBC]

퇴직 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한 가족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다. 사진은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 극중 등장인물인 차민혁(왼쪽에서 두 번째)은 수직적인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가족들은 결국 이런 모습에 폭발하고 만다. [사진 JTBC]

 
자녀들은 자식이면서 부부의 친구이고 조력자이기도 하다. 휴대폰을 살 때 자녀의 도움을 받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을 정도다. 자녀들과 처음 가는 해외여행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은퇴자는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수직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배우자와 자녀는 함께 벌고, 함께 즐기고,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동반자이며 친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 번째 원인은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결혼 후부터 가장은 가정의 수입을 책임졌지만, 퇴직하면서 더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퇴직 후엔 배우자와 서로의 역할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에 서로가 상의해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마지막으로 역할 모델이 없다는 점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2018년 조사한 ‘50·60세대의 가족과 삶’ 보고서에 따르면 5060가구 열에 아홉(87.9%)은 현재 노부모를 모시고 살지 않는다. 그리고 노부모가 혼자 살기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도 자신이 직접 모시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대안 중의 하나가 실버타운이나 요양병원을 이용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고민을 하는 세대가 과거엔 없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낯설다. 퇴직해서 우두커니 집에 있는 것도 낯설고, 나이 60세가 넘어서 부모님을 뵙는 것도 낯설고, 또 부모님이 계시는 요양병원이라는 것도 낯설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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