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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사랑한 약혼녀 보진스카, 왜 파혼을 선택했을까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9)
쇼팽의 약혼녀 마리아 보진스카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 남아있는 쇼팽의 초상화 중 가장 화사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느낌을 준다. 1836, 수채화,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의 약혼녀 마리아 보진스카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 남아있는 쇼팽의 초상화 중 가장 화사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느낌을 준다. 1836, 수채화,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본디부터 강골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 만나고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해서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살롱모임과 각종 파티를 빼놓을 수 없었다. 가족과 떨어져 불규칙한 생활을 오래 하면서 그의 기력은 소진되어갔다.
 
1835년, 25살의 쇼팽은 연초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모를 만나고 독일을 방문하는 등 여름 내내 긴 여행을 했다. 아파트를 같이 쓰던 의사 친구 마투진스키가 돌보아 주었지만, 그해 겨울부터 봄까지 그는 심하게 감기를 앓았다. 이후로 그는 겨울이면 감기를 피하지 못했다. 1835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의 감기는 특히 심해서 쇼팽은 일종의 유언도 친구에게 남겼고, 바르샤바 신문에는 쇼팽의 사망기사가 실렸다가 취소될 정도였다.
 
바르샤바 가족의 걱정은 컸다. 마리아의 어머니 테레사 부인은 지난해 만남에서 마리아가 쇼팽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도 그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소문에 무심할 수 없었다. 부인은 쇼팽 가족에게 그의 건강을 물으며 걱정을 표했다. 그때까지 테레사 부인의 태도로 보면 쇼팽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1836년 3월에 멘델스존과 슈만은 그를 뒤셀도르프로 초대했다. 5월에는 힐러가 프랑크푸르트로 초대했다. 쇼팽은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사교모임도 조절하며 건강관리에 신경 썼다. 그리고 마리아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다.
 
그해 7월 말, 마리아와 테레사 부인의 여름 휴가 계획을 들은 쇼팽은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마리엔바트(Marienbad)로 갔다. 그곳은 한 해 전에 쇼팽이 부모를 만났던 칼스바트 가까이에 있는 휴양지였다. 지난번 만남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고 그동안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그들이었다. 다시 만난 26세의 쇼팽과 17세의 마리아는 이미 맺어진 커플처럼 보였다.
 
온천 휴양지 마리엔바트(현재 체코의 마리안스케 라즈네). 1819년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온천 휴양지 마리엔바트(현재 체코의 마리안스케 라즈네). 1819년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둘은 속닥거리고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같이 곡을 연주했고, 같이 산책을 했으며 작곡도 같이했다. 마리아는 쇼팽의 초상화를 그렸다. 마리아와 테레사 일행이 마리엔바트에서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옮겨갈 때 쇼팽도 동행했다. 드레스덴에는 마리아의 삼촌이 살고 있었다.
 
만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쇼팽이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마침내 9월 9일 해 질 무렵, 쇼팽은 마리아에게 청혼했다. 테레사 부인은 시험적 기간을 두고 건강을 돌본다는 조건으로 쇼팽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분위기는 좋았다. 쇼팽은 파리로 돌아왔고 마리아는 쇼팽의 초상화를 완성한 후 그것을 바르샤바에 있는 쇼팽의 부모에게 전해주었다.
 
이제 자신의 반쪽을 찾은 것인가? 쇼팽은 여유와 활기를 찾았다. 사람 만나는 것도 즐거웠는지 절제하던 사교활동과 대외활동을 늘렸다. 그가 조르주 상드를 마리 다구의 살롱에서 만난 것은 마리아를 만나고 온 다음 달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마리아가 들어와 있었고 상드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 쇼팽은 바르샤바 가족에게 ‘상드라는 유명인을 만났지만 용모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뭔가 거북한 것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쇼팽과 마리아, 두 사람의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약혼 후 받은 마리아의 편지는 살가웠다. 그녀는 드레스덴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폴란드의 고향 집에 있는 옛 피아노를 쇼팽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5월 혹은 6월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동봉된 테레사 부인이 쓴 편지의 톤은 달랐다.
 
우선 부인은 쇼팽의 청혼을 승낙한 것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지 못해 후회하는 듯이 말했다. 무엇보다 약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부인은 ‘해 질 무렵에 생긴 일’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건강을 돌보아야 하며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있다고 했다. 또 곧 바르샤바로 가는데 그때 쇼팽의 부모를 만나보겠지만 ‘해 질 무렵에 생긴 일’에 관해서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쇼팽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다. 누구도 병약한 사람을 사위로 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혼을 받아들인 후 그의 건강상태가 갑자기 더 나빠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것으로 보였던 약혼의 전제 조건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의도도 보였다. 어떤 설(說)에 의하면 무엇보다 마리아의 아버지 보진스키 백작이 신분의 차이를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 테레사 부인은 남편과 충분한 상의 없이 약혼을 승낙한 것일까?
 
마리아 보진스카의 자화상. 마리아와의 약혼은 파혼으로 끝났다. 1836.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리아 보진스카의 자화상. 마리아와의 약혼은 파혼으로 끝났다. 1836.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은 점쟁이를 방문했다. 그가 가족에게 전한 것은 모두에게 복이 있다는 점괘였다. 이듬해 초, 테레사 부인은 쇼팽의 가족에게 쇼팽이 건강에 유념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초봄에 받은 마리아의 편지는 연인 사이에 주고받는 살가운 편지가 아니었다. 문장은 짧았고 너무나 의례적인 말뿐이었다. 이것이 약혼녀로부터의 마지막 편지였다.
 
테레사 부인과는 폴란드를 떠나있던 아들 안토니 건으로 서신 왕래를 계속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슬그머니 화제에서 사라졌다. 한편 리스트와 마리 다구 부인은 조르주 상드와 쇼팽을 이어주려 노력했다. 상드는 쇼팽을 만나고 싶어했다. 자신의 시골집으로 리스트와 마리 다구를 초대할 때 쇼팽도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다. 쇼팽은 응하지 않았다. 쇼팽은 혹시나 하고 마리아의 연락을 기다렸기에, 그의 관심과 움직임을 끌어내는 것은 어려웠다.
 
다시 몸이 아파졌다. 그것은 이제 겨울에서 봄까지 빠지지 않고 치르는 연례행사였다. 1837년 4월에도 5월에도 만나자는 연락은 없었다. 쇼팽은 애가 탔다. 테레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쇼팽의 애끊는 심정이 엿보였다.
 
“오늘 그곳으로 편지를 쓰는 대신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어요.”(4월)
“그곳의 여름은 아름다운가요? … 요즘 파리에 머무는 것은 힘들어요.”(6월)
 
기다리다 지친 쇼팽은 답답한 마음을 풀 겸 피아노 제작자이면서 친구인 카미유 플레옐이 권하는 런던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즐거울 리 없었다. 그는 가능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은 여행 중이라도 연락이 오면 바로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로 가서 마리아 가족을 다시 만나 마리아와 자신의 문제에 매듭을 짓는 것이었다.
 
마리아의 편지 묶음. 쇼팽은 파혼 통고를 받고 마리아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서 묶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절망'이라고 썼다. 쇼팽은 그 꾸러미를 깊이 간직했다. 지금 그 원본은 소실되고 없다. [출처 송동섭]

마리아의 편지 묶음. 쇼팽은 파혼 통고를 받고 마리아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서 묶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절망'이라고 썼다. 쇼팽은 그 꾸러미를 깊이 간직했다. 지금 그 원본은 소실되고 없다. [출처 송동섭]

 
그런데 그가 바라던 대로 런던에서 테레사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편지는 파혼 통고였다. 테레사 부인의 편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쇼팽이 부인에게 보낸 답장은 남아있다. “당신의 편지를 런던에서 받았습니다. … 그것보다 덜 슬픈 편지를 바랍니다. 1837” 테레사 부인은 쇼팽을 좋아해서 그를 자신의 4번째 아들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아 부모의 결론은 쇼팽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쇼팽은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는 마리아에게 받은 편지를 정리했다. 모두 한 꾸러미에 묶고 겉에 “나의 절망”이라고 썼다.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고국의 여인과 가정을 이룬다는 그의 간절한 꿈은 ‘절망’만 남고 깨졌다. 마리아와의 파혼이 준 영향은 컸다. 절망 속에 마음의 지표를 잃은 쇼팽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여인을 일생의 여인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는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 중에 가장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화가는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을 화폭에 담는다. 그것이 그림과 사진의 다른 점이다. 마리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는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둘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1841년 마리아는 쇼팽의 대부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은 거칠었고 아내에게 복종만 강요했다. 얼마 가지 않아 둘은 이혼했고 마리아는 헤어진 남편의 세입자와 재혼했다. 이 재혼에 마리아의 부모는 크게 낙담하여 몇 년간 딸 내외를 보지 않았다.
 
쇼팽이 마리아를 위해 만든 ‘이별의 왈츠’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아픈 기억 때문인지 그는 이 곡을 숨겨두었고 그의 사후에 친구 폰타나가 발견했다. 이 곡은 작품번호 69-1로 1855년 출판되었다. 마리아가 떠난 쇼팽의 빈 가슴에 조르주 상드가 들어가는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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