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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최초 보도한 우에무라 전 기자 “한ㆍ일관계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속아서 위안부가 됐다”’
 
1991년 8월 11일 일본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면에 실린 ‘톱’ 기사에 위안부 문제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한국인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사례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여성 잡지 등에 ‘슬픈 개인사’로만 치부됐던 위안부 문제를 전쟁 범죄 차원의 인권 문제로 끄집어낸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기사 보도 3일 뒤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한국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1991년 12월 김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한 뒤 위안부 문제가 한ㆍ일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결국 92년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이후 96년 4월에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여성 폭력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이 흐름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최초 기사를 보도한 사람이 바로 당시 아사히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ㆍ61)다. 그는 이 보도로 일본 우익들의 공격 대상이 됐고 이로 인해 신문사를 조기 퇴직해야 했다. 심지어 우익 세력은 그의 딸에게까지 ‘죽이겠다’며 협박을 가했다. 그는 현재 이들과 법정 소송 중이다.
 
1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사진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1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사진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1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우에무라 전 기자를 만났다. 그는 일주일 중 3일은 한국에서, 4일은 일본에서 보낸다고 근황을 전했다. 2016년부터 가톨릭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한국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진보 시사 주간지인 ‘슈칸킨요비’(주간 금요일)의 발행인 겸 사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이날 자유언론실천재단이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위안부 취재 우연 아냐…인권 문제 보도 연장선" 
시작은 90년 여름이었다. 당시 우에무라 전 기자는 한국인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2주 정도 머물렀다. 그는 수소문 끝에 위안부 피해자일 가능성이 있는 몇 사람을 만났으나,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일본인인 내가 물어보니 여성들은 '과거 일은 잊었다. 만주 등에는 가본 적도 없다'라고 부인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년 뒤, 우에무라 전 기자에게 한 위안부 피해자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증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렸다. 그는 정대협에 찾아가 녹음테이프에 담긴 30분 가량의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다. “어떻게든 잊고 살고자 했지만 잊을 수 없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바로 이 내용을 기사로 썼다.  
 
우에무라 전 기자가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와세다대학교 4학년 시절인 81년 처음 한국으로 여행 온 그는 대학 시절부터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한 뒤 87년에는 한국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했다. 연수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무라 전 기자는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에서 재일한국인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똑같은 세금을 내고 일본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취업, 선거권 등에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이라는 연재 기사를 통해 이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알렸다"고 말했다. 당시 아사히 신문 지면에는 코너 이름인 ‘이웃 사람’이라는 한글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우연히 위안부 문제를 취재한 게 아니라, 그 문제도 이런 인권 문제 취재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노제를 끝낸 김학순 할머니의 영정과 유해가 장지로 향하고 있다.김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공식사죄와 보상촉구활동을 벌이다 1997년 12월 별세했다. [중앙포토]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노제를 끝낸 김학순 할머니의 영정과 유해가 장지로 향하고 있다.김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공식사죄와 보상촉구활동을 벌이다 1997년 12월 별세했다. [중앙포토]

 
"한·일 관계,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보진 말아야" 
일주일에 한 번씩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우에무라에 전 기자에게 최근 더욱 악화된 한ㆍ일 관계에 대해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치적으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민간 교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물론 혐한층과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족이 많이 생기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 언론에는 ‘제3의 한류 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며 “한국 패션이나 한류스타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정치의 벽을 넘어 교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일본 기사는 ‘한국으로 관광 가는 일본인은 2019년 3월 한 달 동안 37만5000명으로, 월별 기준으로 보면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최고치다’라는 내용이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이런 좋은 가능성도 있다. 젊은이들이 역사와 상관없이 한국을 좋아하고 있는데,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우에무라 전 기자는 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취재하지 않는 한국 기자들에게도 쓴소리를 남겼다.  
 
“한국에는 위안부 문제를 인권 문제의 시각에서 꾸준히 취재하는 전문 기자가 없습니다. 지금은 웅크리고 있긴 하지만 일본에는 그래도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들이 몇 명 있어요. 기자는 남의 불행을 자기 ‘기사 거리’로만 보면 안 됩니다.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게 기자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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