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최범의 문화탐색] 가로등은 어쩌다 전기 솟대가 되었나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현대의 종교예술
 
저 멀리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이내 천둥이 친다. 쇠기둥 위에 섬광이 번쩍인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7m 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기둥 400개가 가로 1㎞X세로 1.4㎞의 공간에 동일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대지미술가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번개 치는 들판(The Lightning Field)’(1977)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소장자인 뉴욕의 디아미술재단(Dia Art Foundation)에 신청을 해야 하고, 관람객은 월터 드 마리아가 설계한 오두막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채식을 하며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쇠기둥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장면을 보기는 좀체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 작품은 자연의 비가시적인 면을 가시화한 것으로서, 시시각각 쇠기둥에 반사되는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니까 말이다.
 
월터 드 마리아의 작업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수직적인 구조물을 고정된 기념비가 아니라 자연의 신비와 신성의 발견을 위한 예술적인 매개물로 전환시켰다. 그것은 절대자 없는 절대자, 신성 그 자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찬양이 아닐까. 계시 없이 오로지 감성으로 만나는 신성. 그것이야말로 종교예술 없는 현대의 종교예술일지도 모른다.
 
토템과 상징
 
울산 장생포의 가로등. 고래로 유명한 지역답게 가로등 머리 장식이 고래 형상이다. 지자체별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린 가로등 디자인이 유행이다. [사진 최범]

울산 장생포의 가로등. 고래로 유명한 지역답게 가로등 머리 장식이 고래 형상이다. 지자체별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린 가로등 디자인이 유행이다. [사진 최범]

수직적 구조물은 대체로 어떤 종교성 내지는 주술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땅과 하늘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무당을 가리키는 ‘무(巫)’라는 글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사람이 서 있는 형상인데, 이것이 의미하는바 또한 그러하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고딕성당의 첨탑지붕, 현대의 고층건물, 각종 기념비 등 모든 수직적 구조물들은 그러한 작용을 한다.
 
캐나다에 가면 북미 원주민들이 세운 토템 폴(totem pole)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토템 폴은 해당 부족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동식물을 새긴 기둥으로서 일종의 정체성 표시 같은 것이다. 북미에 토템 폴이 있다면 한국에는 솟대와 장승이 있다. 다만 솟대와 장승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나 고딕성당처럼 거대하지 않고, 한국적인 소박미를 보여주기 때문에 지금도 대표적인 민속 아이템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지역을 다니다 보면 기묘한 형상이 올라가 있는 가로등을 만나게 된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 주변의 가로등에는 축구공이 끼워져 있고, 울산 장생포에 가면 가로등을 아예 돌고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 어디에는 사과, 어디에는 고추, 인삼 등 다양한 사물들이 한국의 가로등을 장식하고 있다. 이것만 모아도 가히 현대판 『동국여지승람』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과연 우리에게 가로등이란 무엇일까. 온갖 장식을 매달고 있는 가로등은 과거 동네 어귀에 세워놓았던 장승이나 솟대와 무엇이 다른가. 전통은 민속촌이 아니라 전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엉뚱하게 계승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한국에서 가로등은 현대판 장승이며 전기 솟대다.
  
전기 솟대의 꿈
 
한국의 가로등이 전기 솟대가 되어버린 까닭은 사실 지방자치 실시 이후 지역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지역은 어디는 사과 부족, 어디는 까치 부족, 어디는 고래 부족이 되어 각자 자신의 상징을 여기저기에 새기는 현대판 부족사회가 되었다. 가히 토테미즘 국가라 할 만하다. 언젠가 이용섭 광주 시장은 5·18을 기념하기 위해서 518m의 탑을 세우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말해서 논란이 됐다. 민선 7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의 지역은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내게는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전국 243개 지자체의 가로등을 하나씩 뽑아다가 지리산 세석평전에 전기 솟대 공원을 만드는 거다. 그것은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토템 폴 공원에 뒤지지 않는 멋진 한국식 공원이자 신성한 소도(蘇塗·삼한시대 제의 장소)가 될 것이다. 나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현재 한국인의 삶을 전해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예를 찾지 못한다. 미국에 ‘번개 치는 들판’이 있다면, 한국에는 전기 솟대 공원이 있다. 정말 멋지지 않겠는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