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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칼럼] 양극의 독침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파브르 곤충기』엔 왕거미를 포획하는 검은 색 벌이 등장한다. 한국에도 서식하는 이 ‘대모벌’은 거미줄을 피해 은밀히 다가가선 독침(毒針)을 꽂는다. 그러나 죽지 않을 정도의 마취다. 혼절한 거미를 음습한 굴로 끌고 가 그 주변에 알을 낳는다. 깨어난 애벌레는 숨이 끊기지 않아 신선한 거미의 속살을 서서히 파먹고 자란다. 모기와 파리를 없애던 익충(益蟲)인 거미는 결국 껍데기만 남는 최후를 맞는다. 인간의 생태계에도 ‘거미의 비극’이 나타난다. 극단적 사고와 맹신, 과격과 폭력의 독이 건강한 사회를 마비시켜, 갉아먹고 고사시킨다.
 
이 벌은 영리하게 먹이의 가장 취약한 곳을 독침으로 겨눈다. 견고한 마디 간 틈새의 중추신경절이 급소(急所)다. 실업 등으로 나빠진 경제나 실정(失政), 인권 유린, 분쟁과 평화의 위기 등은 독침을 찔러 넣을 절호의 과녁이다.
 
우리 사회에 ‘친일파’와 ‘빨갱이’를 부르짖는 극단의 분열과 갈등이 재현되고 있다.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라는 양극의 독이 배태된 비극의 지점은 해방 직후 혼돈이었다. 당시 2,124명에 불과하던 38선 북쪽의 공산당원들은 3년만에 880만 명이 살던 반도의 절반에 공산정권을 세웠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무려 4000배의 강도로 퍼져 북한을 마취시킨 치명적 독은 바로 무상(無償)의 토지·의료·교육과 평등을 내세운 ‘사회주의 낙원’이었다. 공포에 마주 선 남쪽 극우의 좌익에 대한 폭력·테러가 이어졌고, 김구·여운형 암살이란 역사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민간인만 100만 여명의 전쟁 상흔을 겪은 남쪽. 좌파에 대한 증오와 트라우마, 불신은 극우의 생명력을 끊임없이 이어 준 토양이다. 세대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1980년 대까지 좌파에겐 군부 정권의 폭력과 인권탄압, 이를 묵인한 미국 정권이 공격의 빌미와 생존의 숙주(宿主)가 됐다. 민주화가 진전된 90년대 들어 그들의 유토피아이던 소련이 무너지고 북한 발 ‘고난의 행군’이 수십만 명을 아사시켰다. ‘반미’와 ‘가자 북으로’‘독재 타도’의 동력은 고갈됐다. 머쓱해진 그들이 되살린 과녁은 ‘친일’. 과거사 사죄에 미온적인 일본, 인화력 강한 대중의 불만은 훌륭한 타깃이었다. 더구나 ‘친일파=기득권=독재자의 후예’라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프레임까지 맞아 떨어진 꽃놀이패 아니던가.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순진한 이들의 주문 따위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과격한 극좌와 극우엔 공통의 특성들이 감지된다. 20세기에 빈발하던 군부 쿠데타나 무력 찬탈이 줄어 든 대신 권력을 쥔 자, 또는 권력을 노리는 자들의 제도 정치권이 양극의 직간접 배후로 자리잡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현대 민주체제 붕괴의 40%는 극단적, 권위주의적 정치인들이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서서히 갉아먹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민족’과 ‘애국’을 전유물로 내세우는 행보 역시 공통점이다. 히틀러(‘위대한 게르만’)와 무솔리니(‘로마제국의 영광’) 류의 파시스트, 스탈린(슬라브주의)은 모두 민족의 기억과 배타적, 맹목적 애국을 선동해 지지자를 현혹시켰다. ‘애국’과 ‘민족’ 을 부추기며 진영 밖 이들에겐 모든 유형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분론자(二分論者) 들…. 눈여겨 감별해야 할 위협이다. 사랑과 용서, 자비 라는 종교의 본질과는 극단에 서있으면서 어지러운 나라와 고통받는 이들을 “나만이 구원한다”는 자들….  경계의 대상이다. 성실하고 선한 소시민의 일상(日常)이 바로 진정한 애국이다.
 
양극의 실체적 위험은 법원·의회·언론 등의 국가적, 민주적 제도를 철저히 무시하려는 파괴적 행태다. 법원의 판결이나 탄핵 등의 법적 결론, 검찰의 독립 등을 무시하거나 언론을 겁박, 조종하려는 일탈은 독침을 웅크린 자들의 뚜렷한 징후다. 묘하게도 극우와 극좌는 서로를 창궐케 도와주는 공생(共生)의 자양분이 되어 왔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즘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집권에 성공했다. 극좌 역시 극우의 파시스트적 성향과 기득권 중심의 계층 불평등에 대한 저주를 불지르며 생존한다. “때려잡자 빨갱이”와 “친일파 척결” 모두 서로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적과의 동침’일 뿐이다.
 
전통 미디어 대신 사실의 여과 기능이 전무한 SNS와 인터넷을 선동의 수단으로 삼게 된 건 양극의 자연스럽고 새로운 추세다. 기득권 체제에 비판적이며 기억의 짐에서 자유로운 ‘역사적 백지(白紙)’인 젊은 세대를 철저히 세뇌(洗腦)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모두의 미래를 내팽개친 채 오로지 과거 만을 들쑤시는 건 가장 혐오스러운 그들의 모습이다. 대모벌의 독침에 쏘이면 그 먹잇감은 무려 2~3주 동안 마비에 빠진다고 한다. 우리 사회 역시 이미 중추신경의 마비가 시작된 건 아닐런지…. 극좌와 극우의 독침을 막아내줄 건 어디 한 곳 뚫릴 데 없이 견고한 우리의 이성(理性) 뿐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진 말자. 그러나 미래를 향한 ‘합리’와 ‘실용’의 힘, 그 분별력으로 건강한 균형을 지켜내야 한다. 그게 이 시대의 ‘행동하는 양심’이다.
 
최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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