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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의 시시각각] 실리콘밸리 여성들도 울더라

김수정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김수정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6월 3일 미국 워싱턴 내셔널 포린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아·태지역 외신 담당관 올가는 만삭이었다. “내년 대선 표밭 독도(讀圖)법” “국무부 기획 취재 프로그램 활용법”을 설명하던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미국은 여성의 3개월 출산 휴가를 법률로 보장하지만 무급이다. 출산 후엔 큰 아이 보육비도 막막하다. 나는 (유급)연차와 병가를 모아 출산 때 쓰지만, 신참들은 엄두를 못 낸다.” 그는 외교관 경력 15년 차다. 주한미국대사관 주관으로 ‘젠더 평등과 경쟁력’ 주제의 세미나 투어에 나선 한국 여기자들에게 ‘연대의 정’을 느낀 듯했다.
 
여권 운동의 성지라는 미국의 현실이 당혹스럽긴 했다. 법적 보장에도 임신·출산에 따른 불이익을 주는 직장들이 여전히 있지만, 한국은 남성 공무원들이 육아 휴직 경험을 책으로 내는 세상이다. 저출산 충격 ‘덕’에 임신이 국가적인 축복의 대상이 됐지만 20~30년 전만 해도 임신하면 퇴사를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출산 2주 만에 출근하는 이도 있었다. 요즘 후배들에게 “우리 땐 이랬어” 하면 ‘여자 꼰대’ 취급받기 십상이다.
 
다음날 만난 매기 하산 상원의원(민주당·뉴햄프셔주)의 가슴팍엔 노란 장미가 달려 있었다. “오늘은 100년 전 상원에서 여성들의 투표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19조를 통과시킨 상징적인 날”이라고 했다. 1908년 미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달라’며 생존권과 투표권 시위를 벌인 이래 노란장미는 여성인권과 참정권의 상징이 됐다. 하산은 “100년 전에 그랬듯,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가 사회와 세계를 진전시킨다”고 강조했다.
 
이 세상 절반의 신산한 생존기는 고정 관념을 깨부수며 성장한다는 혁신의 산실 ‘실리콘밸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타트업 시장은 성 불균형이 가장 심한 곳이다.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전자제품 오류 수정 데이터 스타트업 ‘인스트루멘털’ 창립자 애나가 애플을 나와 이공계 여대생과 실리콘밸리 여성 간 맨토링 프로그램에 나선 이유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앱‘킷킷스쿨’로 일론 머스크가 주최한 문맹 퇴치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서 우승, 상금 500만 달러를 거머쥔 ‘에누마’의 이수인 대표도, 전자공학에서 생명공학으로 전공을 바꿔 뇌질환 진단 기술을 개발 중인 스탠퍼드대학의 이진형 교수도 그랬다. “첨엔 내가 뭘 잘못한 줄 알았다. 위로는 유리천장이 있고, 아래에선 ‘여성의 권위는 싫다’는 공격이 들어온다. 백인 남성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이 교수는 미 국립보건원(NIH)의 지원금 약 20억원을 따냈다. ‘전공 바꿔 굴러온 돌, 아시아 출신 여성’ 이 교수의 펀딩 성공은 화제였다. 흥미로운 기사가 13일 뉴욕타임스에 났다. 프랜시스 콜린스 NIH 원장이 “남자 과학자들만 패널이나 발표자로 들어간 학술발표회 등엔 참가하지 않겠다. ‘매널’(남성의 man과 패널의 합성)의 전통을 끝내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기사다. 여성 등 저평가된 집단의 성취를 막는 미묘하고 노골적인 편향을 부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 어린 학생이 옆자리에 앉았다. ‘ … sex’란 글자에 얼른 넘겨 버린 영화를 귀국길 다시 보니 ‘On the basis of sex’가 제목이다. 교수가 여학생에겐 질문도 던지지 않던 시절 하버드 법대에 들어가, 70년대 변호사로서 ‘성에 근거한’ 차별적 법들을 무너뜨린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의 얘기다. 그의 투쟁 화두는 “인구의 절반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 “세상은 확실히 변하고 있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대로인 화두다. ‘매널’의 뿌리는 깊고 넓다. 절반의 성(性)의 행복은 나머지 절반의 행복이고, 공동체 진화의 대전제다. 여와 남이 다르지 않다. 군대 가산점 문제, 여성 차별 문제 모두 진지하게 토론돼야 할 이슈다. ‘남혐’ ‘여혐’ 같은 극단의 목소리에 휘둘릴 일이 아니다.
 
김수정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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