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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6·25전쟁 초 안보리에 우슈취안·차오관화 파견

1949년 12월 6일 소련을 방문하는 마오쩌둥을 산하이관(山海關)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우슈취안(오른쪽 둘째). 왼쪽부터 외교부 부부장 리커농, 훗날 부총리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한 리푸춘(李富春), 철도부장 텅다이위안(滕代遠), 마오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우슈취안. [사진 김명호]

1949년 12월 6일 소련을 방문하는 마오쩌둥을 산하이관(山海關)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우슈취안(오른쪽 둘째). 왼쪽부터 외교부 부부장 리커농, 훗날 부총리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한 리푸춘(李富春), 철도부장 텅다이위안(滕代遠), 마오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우슈취안. [사진 김명호]

1991년 5월 10일 홍콩에서 황먀오즈(黃苗子·황묘자) 부부를 만났다. 천안문사태 이후 호주에 머물며 가끔 홍콩 오간다며 웃었다. 서울 나들이 권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부인이 명화가 위펑(郁風·욱풍)인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위펑이 친구에게 들었다며 항미원조(抗美援朝) 얘기해서 깜짝 놀랐다. 중국인들은 6·25 전쟁을 그렇게 불렀다. “항미원조에 지원한 친구가 있었다. 압록강 건너 서울까지 종군기자로 활약한 맹렬여성이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서울이 다시 비상하기 시작했다며 제 일처럼 좋아한다.”
 
다음날 베이징에서 온 치궁(啓功·계공) 노인과 어울렸다. 망명객이나 다름없던 대화가 황용위(黃永玉·황영옥) 부부와 아들도 함께했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항미원조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황먀오즈와 위펑의 서울 나들이는 그렇고 그랬다. 서울 떠나던 날 황먀오즈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장한즈(章含之·장함지)의 책을 본 적 있느냐? 베이징에 가면 만나 봐라. 세상 떠난 전 외교부장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의 부인이다. 항미원조에 관해 아는 것이 많다.”
  
차오관화 부인 "대학 때 항미원조에 열광”
 
몇 년 후 베이징에서 황먀오즈와 위펑의 귀국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개막식 참석자 면면이 일품이었다. 둔황(敦煌)학회 비서장이 “여기 폭탄이 터지면 한동안 중국은 깜깜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황먀오즈가 내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장한즈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소 보니 어딘지 알 만했다.
 
스자후퉁(史家胡同)의 고풍스러운 스허위엔(四合院)에서 노부인을 만났다. 마오쩌둥과 장한즈 부친의 친필 족자가 걸려 있는 거실은 품위가 넘쳤다. “평양에 가 봤느냐?” “못 가봤다.” “여행은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남편이 정전협정에 참여한 지 몇십 년이 지났다. 아직도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느냐? 차오관화는 한국과 인연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항미원조로 전국이 열광했다. 나도 매일 거리에 나가 항미원조 참여를 외쳐 댔다. 우리 연령층 모두가 그랬다.” 나는 이 사람들이 항미원조라 부르는 6·25전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았다.
 
차오관화의 말년을 물었다. 노부인의 말은 횡설수설 두서가 없었다. “세상 떠나기 며칠 전 시중쉰(習仲勛·습중훈)과 우슈취안(伍修權·오수권) 동지가 다녀갔다. 김일성 주석은 마오쩌둥 주석에게 극진했다. 마오 주석은 김일성이 생일선물로 보낸 황주 사과를 내 결혼 전날 밤 보내 줬다. 남편은 개성 얘기를 자주 했다. 딸 이름도 개성 옛 지명인 쏭두(松都)라고 지었다. 항미원조 정전 담판 북한 측 대표 남일이 지어 줬다. 항미원조 초기, 우슈취안 동지가 유엔에 갈 때 남편도 같이 갔다.” 우슈취안은 4인방 재판의 재판관이었다. 6·25 전쟁 초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차오관화와 함께 참석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6·25전쟁 발발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대만의 중화민국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했다. 소련제 탱크가 38선을 무너뜨렸다. 이튿날 미국이 참전을 선포했다. 3일 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했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도 인도차이나전쟁에 투입했다. 신중국은 미군이 중국을 포위했다며 발끈했다. 외교부장을 겸하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성명을 냈다. “미국이 무슨 행동을 하건, 대만이 중국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 7함대의 중국영토 침범은 유엔헌장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인민정부 위원회 8차 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도 포문을 열었다. “전 세계 각국의 업무는 그 나라 인민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주(亞洲)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주 인민들의 일이다. 미국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은 아주 인민들의 폭넓고 단호한 저항을 초래할 것이다. 1월 5일 트루먼은 대만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5개월 전의 성명이 허위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대만의 국민정부는 북한의 남침 소식에 들떴다. ‘반공대륙(反攻大陸)’의 기회가 왔다고 흥분했다. “북한을 통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진입하고, 동남 해안지역을 제2의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며 전쟁이 확대되기를 희망했다.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전쟁 발발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 표명하는 전문을 보냈다.
 
6월 29일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자 국민당도 미 국무부에 비망록을 전달했다. “북한이 무력으로 남한을 침공했다. 중화민국은 남한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 C46 수송기 20대로 최정예 3만3000명을 5일 안에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다.” 장제스의 의견도 곁들였다. “중화민국 정부군은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도착이 가능한 우군이다.”
  
우슈취안, 장정 시절 대부분 전투에 참여
 
유엔헌장 선포식에 중국 해방구 대표로 참석, 헌장에 서명하는 중공 화베이(華北) 인민정부 주석 둥비우.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진 김명호]

유엔헌장 선포식에 중국 해방구 대표로 참석, 헌장에 서명하는 중공 화베이(華北) 인민정부 주석 둥비우.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진 김명호]

미국정부의 의견이 엇갈렸다. 트루먼은 찬성했다. “국민당 군대가 참전하면 미군 투입을 감소시킬 수 있다. 사망자도 그만큼 줄어든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반대의견을 냈다. “미국은 이미 7함대를 대만에 파견했다. 공격받을 지역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보위를 위해 함대까지 파견한 지역의 군대를 한반도에 참전시키는 것은 모순이다. 장제스 군대의 전투력도 장담할 수 없다. 대만이 참전하면 공산중국도 참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은 장제스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유엔총회에 참석한 중화민국 외교부장도 “미국은 대만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9월 15일 맥아더가 지휘하는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서울 수복 직전인 9월 17일 저우언라이가 총회를 앞둔 유엔 사무총장 리에게 전문을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한다. 총회에서 대만의 국민당 대표를 축출해라. 관철되지 않으면 중국에 관한 모든 결의는 불법이다. 우리는 무효로 간주하겠다.” 24일 리에게 항의 서신을 보냈다. “미군 비행기가 우리 영공에 침입했다. 안둥(지금의 단둥) 중심가에 포탄 12발을 투하했다. 총회에 우리 대표단을 파견해 미국의 죄상을 밝히겠다.”
 
저우언라이는 유엔에 누구를 보낼지 고심했다. 전쟁 중에는 국제무대에 군인을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우슈취안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우슈취안은 1908년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의 빈민가정에서 태어났다. 개울물로 끼니 대신하고, 학교 문턱엔 가 보지도 못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중공 창당 발기인 천탄치우(陳潭秋·진담추)와 둥비우(董必武·동필무)의 소개로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2년 후 모스크바로 갔다. 중산(中山)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익혔다. 행동이 민첩하고 장악력이 뛰어났다. 모스크바 보병학교에서 모셔갈 정도였다. 졸업 후 소련 극동국 산하 정보기관에서 외교 문제를 담당했다. 22세 때 소련 공산당 후보당원 자격증을 받았다. 중국 홍군이 어렵다는 소식 듣자 자진해서 귀국했다. 장정시절, 중국 역사에 남을 모든 전투에 빠진 적이 없었다. 선전 실력도 탁월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유엔창설이 임박했다. 장제스는 중공 대표도 참여시켰다. 중공은 둥비우와 우슈취안을 추천했다. 국민당은 우슈취안을 경계했다. 국민당 정보기관이 우슈취안의 손이 눈에 자주 가는 것을 주목했다. 국제 의전상 트라코마 환자는 외교무대에 내보낼 수 없다며 우슈취안을 탈락시켰다.
 
5년 후 신중국이 탄생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트라코마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외교부 부부장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이 우슈취안과 함께 대표단을 선정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였다. 구석구석에 인재가 많았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받고 귀국한 청년과 러시아어에 능통한 여성을 통역으로 차출했다. 초대 신문출판국장 차오관화도 고문자격으로 합세했다. 준비를 마친 저우언라이는 연일 미국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계속>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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