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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연극] 눈물을 흘리는 순간과 눈물이 고이는 시간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불 꺼진 객석에서 숨죽이며 눈물을 흘리는 경험은 흔한 게 아니다. 눈물은 이야기 안의 사람들과 사람들 안의 이야기가 만나면서 서로의 마음이(感) 움직일 때에야(動) 만들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눈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 공연에 호기심이 생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요즘 공연되고 있는 ‘킬미나우’(사진)가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연될 때마다 관객들을 오열하게 하기로 이미 유명하다. 애초부터 감상적인 말랑함 따위는 없는 이야기이다. 중증 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과 존엄한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현실적인 무거움이 가득하건만 관객들은 그 무게를 꺼리기는커녕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공감을 표시한다. 
 
눈물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일상적인 삶을 꾸려나가기 힘든 아들을 아버지는 헌신적으로 돌본다. 그런데 가혹하게도 이 아버지에게 질병이 찾아온다. 천천히 마비되어 점차 스러져가는 몸을 견디는 아버지. 끝내 그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존엄사는 아직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결말이 아니건만 이 아버지에게 관객들이 깊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삶에 숭고함과 부조리가 동시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헌신과 희생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아버지의 부성애는 예상치 못한 결론인 만큼 강한 감정의 에너지로 관객을 밀어붙인다.
 
문화비평 6/15

문화비평 6/15

그런데 이 작품의 이야기가 눈물의 감정으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장애를 가진 아들’과 ‘질병을 가진 아버지’ 사이의 무게 중심을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장애와 질병으로 옮기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마비된 사람의 일상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몸이 마비되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있다.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불편함도 어렵지만, 그들은 생리적인 욕구 해결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는 수치심에 맞닥뜨려야 한다. 그 앞에서 한 사람은 당당한 삶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눈물을 잠시 거둬야 한다. 부성애라는 익숙한 틀 안으로 이들을 끌어당기지 않고 불편한 몸과 더불어 사는 이들의 세계를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아들이 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아들은 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마비되어가는 몸에 대해 물었다면 아들은 자기의 경험으로 넉넉히 답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통에 사로잡히고 관객은 눈물에 사로잡혀 아들이 살아내는 일상을 지나쳐버린다. 이 일상이야말로 ‘불구의 몸’에 대한 존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통로이건만.
 
아버지의 존엄한 죽음이 선택이라면 아들의 당당한 삶은 용기이다. 존엄한 죽음에 공감했듯이 삶의 용기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다른 몸을 가진’ 아들의 삶을 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감의 시작은 여기부터일지 모른다. ‘당신과 나는 달라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잘 몰라요.’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시간은 시작될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고인 눈물에는 왈칵 풀어놓는 마음이 아니라 천천히 쌓이는 이해가 녹아있을 것이다.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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