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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정원장 “죽을 지경” 하소연에 숨은 의미

곽길섭 원코리아센터 대표·전 국정원 대북정보관

곽길섭 원코리아센터 대표·전 국정원 대북정보관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비공개 만찬 회동을 둘러싼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논란이 급기야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됐다. 국정원법상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혐의로 서 원장이 검찰에 고발됐기 때문이다. 대북 정보 현장에서 30년 활동한 필자는 안타까움과 함께 서 원장이 배석자에게 한 하소연을 더 주목한다. 서 원장은 “국내정치 파트를 조직적으로 다 도려내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죽을 지경이다. 모든 소통을 끊을 순 없어 본인이 언론계, 여야 정치인, 외국 정치인, 싱크탱크 인사들을 직접 만나고 다닌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회동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별개로 하더라도 서 원장의 이런 고백에서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한다.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은 조기경보 등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문제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며 큰 생각을 해야 하는 자리다. 이렇게 막중한 자리에 있는 책임자가 실무자급의 일을 하느라 죽을 지경이라고 하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961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 창설 이후 지난 58년간 국정원 역사 속에 34명의 원장이 임명됐다. 이들은 한결같이 국가와 사명감을 강조했으나, 리더십은 제각기 달랐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조직을 운영한 ‘우리의 원장’도 있었지만, 소의(少義)와 소리(小利)에 집착해 불명예를 얻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장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업자득이다. 서 원장은 취임 직후 ‘완전한 탈정치’를 선언했다. 국내정보부서 2개를 전격 폐지했다. 보완하면 쓸 만한 팔과 다리를 아예 잘라 버린 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치는 북한·해외·국내·사이버 분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구획(division)보다는 융합(fusion)을 특징으로 하는 글로벌·디지털 정보 현장의 추세와 충돌한다.
 
실제로 정보 수집관(IO)과 분석관을 중심으로 한 국내정보 활동이 폐지된 이후 첩보의 수집-분석-보고 사이클에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국내정보 활동을 복원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 원장의 대국민 신뢰회복을 위한 결단을 존중하지만, 정보판단 능력을 키우는 ‘신개념의 정보활동 체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군·경찰·정부부처와의 실질적 공조를 위한 법적·제도적 보완 ▶국민의 자율적 안보와 국익 첩보보고(인센티브식 보상제)를 위한 통합정보시스템 구축 ▶전문인력 조기 사장 방지를 위한 계급 정년제 폐지 등을 검토해야 한다.
 
20대 국회에는 국정원법 개정안 14건이 계류 중이다. 그러나 개정안의 대부분은 정보 역량 강화보다는 수사권 이관 등 국민기본권 침해 예방에 쏠려 있다. 과거의 업보(業報)로 인해 직원들은 개혁의 취지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워서도 안 되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 국정원 구성원들은 “전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과 환경은 보장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법률 미비로 인해 범죄자나 간첩 혐의자에 대한 합법적인 휴대전화 감청도 할 수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예산도 축소되고 직원들의 자긍심도 움츠러들고 있다. 수사권 이관 논란 속에서 대간첩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 2017년 0명, 2018년 이후 1명에 불과한 간첩체포 실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등 선진국들은 국가안보에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한국도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감시체계는 보강해야 맞다. 동시에 글로벌 스탠더드에 기초한 정보 역량을 강화하고 합법적 활동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국정원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해서 하는 고언이다.
 
곽길섭 원코리아센터 대표·전 국정원 대북정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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