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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향년 97세로 별세

이희호 여사. [연합뉴스]

이희호 여사. [연합뉴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이 여사가 6월 10일 오후 11시 37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부인’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강인한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를 만나게 된다. DJ가 이룬 민주화 운동의 업적에서 이 여사의 지분은 작지 않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당시로선 드문 신여성이었다. ‘희호’라는 이름은 그 출발이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과 같은 돌림자 ‘호’를 딸에게도 붙여줬다. 당시 여성이 누리기 힘든 일이었다. 부모는 감리교를 믿어 서양식 사고에 익숙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무조건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였지만 나는 위로 오빠가 셋이나 있었기에 운 좋게도 크게 환영을 받으며 태어난 딸이었다”고 적었다.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켜야한다는 열의가 컸다. 그런 어머니는 이 여사가 18살 때 돌아가셨다. 이 여사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화여전(현 이화여대)과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스카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였던 수필가 피천득은 이 여사를 “언니스러운 인품과 활발한 성격은 (이 여사가) 사범대 전교 여학생들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이 여사가 평생의 동행자 DJ를 만난 건 1951년 피란지 부산이었다. 이 여사는 당시 여성운동에 투신하고 있었고, DJ는 해운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DJ는 이 여사를 “이지적인 눈매를 지닌 활달한 여성”으로 기억했다. 공부를 많이 한 인텔리 여성 앞에서 주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었다.  
 
DJ는 이후 3ㆍ4ㆍ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리 낙선했다. 그 사이 전처인 차용애 씨와도 사별했다. 외롭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는 말벗이었던 이 여사를 찾았다. 그들은 이 여사가 총무로 있던 대한YWCA가 자리한 명동에서 산책을 하며 정치 등을 주제로 토론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커졌고, DJ는 청혼을 했다. 이 여사는 이미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이 여사는 후에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애 둘 딸린 홀아비에 빈털털이였던 DJ와의 결혼을 다들 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1962년 결혼을 한 뒤 열흘 만에 이 여사는 DJ가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결혼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여사는 DJ에게 시련을 에둘러가라고 타이르지 않았다. 이 여사는 1972년 미국에서 한국의 독재 상황을 알리던 DJ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편지를 썼다. 유신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했다. 이 여사는 DJ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이 여사는 스스로가 민주화 운동가였다.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으로 DJ가 구속되자 함께 구속된 이의 부인들과 함께 양심수가족협의회를 결성했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상징하자는 뜻에서 입에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를 만들어 붙이는 시위도 이끌었다.  
 
이 여사는 DJ를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 여겼다. 1977년 DJ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집에 난방도 하지 않았다.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이 불을 떼지 않는 교도소에 있는데, 자신만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냉방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다 정신을 잃기도 했다.  
 
1980년 군사재판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DJ에게 이 여사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 (당신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이 고난의 상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DJ 부부의 삶의 방향은 달라졌다. 이 여사는 이제 옥바라지 대신 지원 유세 등 선거를 함께 했다. 그 해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DJ와 함께 이 여사는 전국을 돌았다. 충남 서산 연설에서 이 여사는 찬조연설을 했는데, 당시 언론에선 “웬만한 정치 연설꾼 실력을 웃돌아 부창부수라는 중평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1992년 대선 낙선 뒤 DJ가 불러주는 정계 은퇴서를 받아쓴 이가 이 여사이기도 했다.
 
1997년 대선에서 DJ는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부인을 부르는 명칭이 ‘영부인’ 대신 ‘여사’로 바뀐 것도 이 때다. 이 여사가 “대통령의 부인이기 전에 ‘나 자신’이고 나이도 들었으니 여사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건의한 결과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어린이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어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출간했고, 판매수익으로 결식 아동을 도왔다.
 
DJ는 1983년 미국 망명 시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여사를 설명할 때 DJ를 먼저 떠올리지만, DJ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때 아내를 앞세우곤 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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