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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아들 위덕왕 이어주던 신기(神器), 백제금동대향로

[이훈범의 문명기행] 부여 나성
수도 사비(부여의 옛이름)를 에워싼 백제 나성. 백마강이 도시를 ‘C’자형으로 감싼 나머지 동쪽 부분에 쌓았다. [박종근 기자]

수도 사비(부여의 옛이름)를 에워싼 백제 나성. 백마강이 도시를 ‘C’자형으로 감싼 나머지 동쪽 부분에 쌓았다. [박종근 기자]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땅은 성곽으로 갈리었다. 나성(羅城) 안은 산 자의 생활 터전이요, 밖은 죽은 자의 안식처였다. 부여 나성 얘기다.
 
부여 나성은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부여)를 왼편에 품고 남북으로 치달려 내려온다. 구글어스로 오늘날 부여 일대를 보면 그 이유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백마강(금강)이 부여를 감싸 안고 ‘C’자 모양으로 돌아 흘러 천연 요새 역할을 하는 까닭에 동쪽 C자의 입구만 성벽(동나성)으로 막으면 빈틈 없는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위쪽으로 주산성인 부소산성과 그 오른편으로 보조산성인 청산성을 잇는 나성(북나성)만 보태 완벽을 기했을 뿐이다. 과거 서쪽과 남쪽 나성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서쪽에 흙을 길게 쌓아 올린 흔적이 있어 서나성으로 추측되기도 했지만 결국 홍수를 막기 위해 후기에 쌓은 인공제방이었음이 밝혀졌다.
  
능산리 절터 발굴 때 국보 사리감도 찾아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절터. [박종근 기자]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절터. [박종근 기자]

서나성과 남나성도 존재했으리란 추측은 중국의 도성 구조에 따른 것이다. 중국의 도성은 대체로 평지에 방형으로 만들었는데, 사비도성이 계획적으로 만든 수도였으므로 중국의 도성 개념을 충실히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역대 중국 왕조는 『주례(周禮)』‘고공기(考工器)’를 전거 삼아 도성을 건설했다. ‘고공기’에는 도성의 규모와 문 수, 남북과 동서를 잇는 도로의 수와 폭 같은 기본적 원리가 제시돼있다.
 
북위 효문제가 493년 천도해  새로 만든 낙양성 역시 ‘고공기’를 토대로 만든 도성이었다. 백제 성왕이 북위와도 교류했으므로 538년 사비로 천도할 때 이 낙양성을 벤치마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국가사찰이었던 정림사가 북위의 국가사찰이었던 영녕사처럼 남북으로 뻗는 주작대로 변에 위치한 것이 이를 웅변한다.
 
하지만 도성 내에 산이 있는 사비에서는 평지에 건설된 낙양성처럼 방형으로 바둑판처럼 정연한 시가지 배치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지형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만들었다. 오늘날 관북리에 왕궁을 짓고 북쪽으로 닿아있는 부소산에 산성을 쌓아 위기 때는 피난성으로, 평상시에는 후원으로 활용했다.
 
이미 언급했듯 강이 천연 해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나성을 동북지역에만 산의 난간을 따라 쌓았다. 이 부여 나성은 552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장안성보다 축조 시기가 빠른 우리나라 최초의 나성이다.
 
사실 나성은 흔히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중국에서도 거의 당나라 이후에 생겨난 말이다. 주나라 때 왕궁을 둘러싼 2중의 성을 쌓고 안쪽을 성(城), 바깥쪽을 곽(郭)이라 일컫는 ‘내성외곽’ 개념이 생겨났고, 왕성(王城) 남쪽에 주로 형성되는 시가지를 성벽으로 에워싸는 형태의 도성 구조가 남북조시대에 완성됐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당나라 때는 이 중 가장 큰 외곽의 성을 나성, 그 안쪽의 성을 자성(子城), 나성 안 또는 밖의 또 다른 성벽을 아성(牙城)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낯선 아성은 주장(主將)이나 주군이 거처하는 성으로, 성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중요한 근거지를 잃는다는 뜻의 ‘아성이 무너지다’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영국의 ‘킵(Keep)’, 프랑스의 ‘동종(donjon)’ 그리고 막부 시대 일본 성들의 천수각(天守閣) 등이 아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이후 점점 자세한 구분 없이 안쪽 성을 내성, 바깥쪽 성곽을 외성으로 부르게 됐다. 따라서 나성이란 도성(都城)과 동의어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부여 나성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나성 오른편, 즉 나성 바깥 쪽에 죽은 자들의 땅이 마련됐다. 요즘 우리가 능산리 고분군이라 부르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무덤의 주인은 알 길이 없다. 도굴도 그렇지만 백제의 경우 무덤 주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규모나 형태로 봐서 왕릉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비 시대 왕릉의 전형적인 형태인 석실분이기 때문이다. 모두 7기의 무덤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중하총이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가 무녕왕릉과 매우 비슷한 터널형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것은 종교다. 필연적으로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에도 사찰이 있었다. 1995년 이 능산리 절터를 발굴 조사할 때 사리를 담은 용기를 보관하는 사리감(국보 288호)이 발견됐다. 사리 용기는 이미 도굴되고 없었지만 사리감 양쪽 면에 각각 1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봉황과 신선, 백제인의 도교적 인생관이 …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인 금동대향로. [박종근 기자]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인 금동대향로. [박종근 기자]

‘백제창왕십산년태세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정해매O공주공양사리(丁亥妹O公主供養舍利)’
 
성왕의 아들인 창왕(위덕왕) 13년(567년) 창왕의 누이인 O공주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사리감은 위쪽이 아치형으로 중하총의 현실(玄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능산리 절터는 자칫 역사에서 사라진 채 아스팔트로 덮일 뻔했었다.  당초 이 자리에는 나성과 고분군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이 조성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가 최근 펴낸 책 『국보를 캐는 사람들』에 당시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그에 따르면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현 울산박물관장)은 예부터 이곳에서 백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요즘이야 흔해빠진 게 기와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사찰이나 궁궐 같은 귀한 건물에만 쓰였기 때문이다. 1993년 주차장 조성을 앞두고 마지막 발굴 기회가 있었지만 시간과 예산이 모두 부족했다. 신 전 관장은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으로 달려갔고, 2000만원의 예산을 따냈다. 하지만 빠른 시간 내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강행될 게 뻔했다. 시굴(試掘)만 하라는 허가를 무시하고 사찰 서쪽 건물터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정성은 헛되지 않았다. 물 웅덩이 속에서 금속 물건의 한쪽 귀퉁이가 발견된 것이다. 12월 말의 추위 속에서 금속 주변의 진흙과 기와를 제거하는 세 시간여의 사투 끝에 보물이 자태를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백제의 정신문화와 예술적 역량을 함축한 대표적 유산 중 하나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다.
 
향로는 봉황과 신선들이 사는 박산 장식의 뚜껑과 피어나려는 연꽃 봉오리의 몸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용의 모습을 한 받침으로 구성돼있다. 중국 『주서(周書)』는 (백제에) “도사는 없다(而無道士)”고 기록하고 있지만, 백제인들이 도교적 인생관도 향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 근수구왕이 태자 시절 고구려군을 추격해 오늘날 황해도 신계에까지 이르렀을 때 수행한 장수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도덕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향로의 도교적 색채 탓에 중국에서 수입된 박산향로라는 일부 중국·일본 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 중국 향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독보적 크기에 비춰 백제의 유산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가 61.8cm, 몸통 최대 지름이 19cm, 무게 11.8kg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의 것이다. 일반적인 향로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그 중에서도 백제 성왕과 그 아들 위덕왕을 이어주는 신기(神器)가 아니었을까.
 
절터의 추가 발굴에서 향로가 발견된 자리가 절의 공방 터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모조품을 전시해놓았는데, 그것만 봐도 백제 예술의 정수를 1400년 만에 영접하는 고고학자들의 희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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