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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성 주석 맡아라”…장제스 강권에 우궈쩐 수용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0>
국방부장 시절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와 환담하는 장징궈(오른쪽 둘째). 오른쪽 셋째는 당시 주일대사 펑멍지. 1969년 4월, 도쿄. [사진 김명호]

국방부장 시절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와 환담하는 장징궈(오른쪽 둘째). 오른쪽 셋째는 당시 주일대사 펑멍지. 1969년 4월, 도쿄. [사진 김명호]

1949년 12월 9일, 국민정부 윈난(雲南)성 주석 루한(盧漢·노한)이 중공에 투항했다. 시캉(西康)성 주석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도 마오쩌둥 만세를 불렀다. 시캉성에 이웃한 쓰촨(四川)성 중심도시 청두(成都)가 술렁거렸다.
 

아들 장징궈에겐 군 정치부 맡겨
공포의 상징 비밀경찰 이끌어

법치주의자 우궈쩐과 충돌 일쑤
장제스는 중재하느라 애먹어

우궈쩐 미국서 장씨 부자 전횡 비판
대륙행 준비하다가 심장마비사

국민당 총재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청두의 중앙군관학교에 머물며 청두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10일 오전, 루한이 류원후이에게 전보를 보냈다. “쓰촨의 군 지휘관들과 연합해 장제스를 잡아 가둬라.”
 
장제스의 정보기관도 전문을 입수했다. 경호대장이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숙소 주변에 수상한 자들이 어슬렁거립니다. 후문에 차를 대기시켰습니다.” 장제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정문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곳으로 나가겠다.”
 
이날 장징궈(蔣經國·장경국)의 일기를 소개한다. “부친은 오찬 들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오후 2시 펑황산(鳳凰山)공항에 도착했다. 먼 산과 하늘에 몇 차례 눈길 주고 비행기에 올랐다. 6시 30분, 타이완에 도착했다.”
 
8개월 전 타이완에 온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은 섬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시카고트리뷴 발행인 맥코믹에게 편지를 보냈다. “타이완은 대륙과 격리된 안전한 곳이다. 반공(反攻)기지로 손색이 없다. 일본통치 50년간 타이완 사람들의 조국 사랑은 식지 않았다. 101차례에 걸친 무장폭동이 그 증거다. 일본 패망 후 장제스 위원장이 군인을 성 주석으로 파견하는 바람에 대륙인에 대한 악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경제 문제도 심각하다. 7개월간 화폐 발행량이 17배 증가했다. 트루만 정부는 타이완을 포기했다. 우리는 미국의 원조가 절실하다.”
 
1950년 8월 7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우궈쩐.

1950년 8월 7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우궈쩐.

장제스는 타이완 도착 이튿날 전 외교부장을 불렀다. “우궈쩐을 만나라. 내 뜻이라며 타이완성 주석직을 제의해라.” 우궈쩐은 완곡히 사양했다. 장제스가 직접 우궈쩐을 호출했다. 성 주석 맡으라며 이유를 곁들였다. “다들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타이완 빠져나갈 궁리에 여념이 없다. 너는 집을 지었다고 들었다. 너야말로 고독한 낙관주의자다. 보안사령관도 겸해라.” 우궈쩐이 재차 거절하자 문건 한 장을 내밀었다. “미국 정부가 보낸 비밀 전문 번역본이다.”
 
간단한 문건이었다. 타이완정부를 혹독히 비판하며, 성 주석을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 기용하라는 내용이었다. 건의가 채택되면, 미국정부가 제공할 군사 및 경제원조 내역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우궈쩐은 문건 말미에 서명이 없다며 영문 원본을 보자고 했다. 장제스는 수중에 없다며 웃었다.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수많은 문관이 있지만, 너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 너는 미국 언론의 호평을 받는 유일한 문관이다. 거절하지 마라. 무슨 일이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장제스는 장징궈에게 군 정치부를 맡겼다. 참모총장은 눈치가 남달랐다. 육·해·공 3군의 정치공작을 장징궈에게 일임했다. 계엄령 시대이다 보니 장징궈의 권력은 총정치부 주임과 구국단 주임이라는 공개된 직함을 초월했다. 총통부 내에 자료실을 신설해 전국의 특무조직을 장악해 버렸다. 우궈쩐이 겸직한 보안사령관은 있으나 마나,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팽맹집)가 실권자였다. 펑멍지는 장징궈의 수족이었다. 장징궈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들었다.
 
장징궈가 이끄는 비밀경찰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1949년 말에서 50년 6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만여 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그중 천명 이상을 총살시켰다. 그 후에도 한동안 매년 300명 정도는 간단한 재판받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법치주의자 우궈쩐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장제스가 중재에 나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궈쩐은 성격이 급하고 자존심이 강했다. 원칙론자이며 미국식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대중 앞에 나서기도 좋아했다. 장징궈는 민주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스스로 독재자를 자임한, 특이한 독재자였다. “나는 내가 독재자라고 인정한다. 단, 나는 독재로 독재를 종식시키려 한다. 나는 최후의 독재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빈말이 아니었다. 계엄령도 제 손으로 해제하고 법으로 금지시킨 야당 창당도 모른 체했다. 총 맞아 죽거나, 비참하게 쫓겨난 독재자와는 격이 달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이 타이완에 넘쳐났다. 역할이 없어진 우궈쩐은 실총(失寵)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미국행을 권했다. 미국에서 장씨 부자의 전횡을 비판하는 바람에 한동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말년에 옛 친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부인이 보낸 초정장을 받았다. 대륙행 여장 꾸리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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