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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어떻게 나라 곳간은 무너지는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획재정부는 스스로를 ‘나라 곳간의 파수꾼’으로 부른다.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곳간을 잘 지켜 다음 정부에 넘겨주는 걸 장관의 제일 덕목으로 여겼다. 가깝기로는 이명박 정부 때 박재완 장관이 좋은 예다. 그는 균형 재정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이 민생복지를 위해 국채 추가 발행을 요구했지만 끝내 버텼다. 그는 이듬해 1월 기재부 시무식에서 “균형재정 원칙을 지키는 것은 우리 직무의 특성이 부여한 숙명”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기재부가) 당선인의 공약과 반대 정책을 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압박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시아판 사설에서 “포퓰리즘에 맞설 배짱을 가진 정부 고위 인사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합리적 사고를 하는 박재완 장관에게 찬사를 보낸다”고 적었다.
 
기재부의 파수꾼 역할은 유래와 전통이 깊다. 노하우도 다양하다. 불용예산이 그중 하나다. 예산에는 있지만 집행 안 된 돈이 불용예산인데, 기재부는 이를 종종 ‘쪽지예산’을 막는 데 썼다. 전직 고위관료 A는 “간혹 국회의원과 ‘거래’도 했다. 집행은 안 해도 좋으니 예산에만 담아주면 정부 예산안을 통과시켜 주겠다는 식이다. 의원은 지역 주민에 예산을 땄다고 큰소리쳐서 좋고, 기재부는 예산안은 통과시키되 실제 집행은 안 하니 윈윈이었다. MB 정부 때 불용된 예산이 연 4~5%, 10조원쯤 된다.”고 했다.
 
이런 전통은 이 정부에도 이어졌다. 지난해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도 그중 하나다. 그는 4조원의 적자 국채 발행 시도와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의 국가 채무비율을 39.4% 이상으로 높이라’는 경제부총리의 지시를 폭로했다. 나는 그의 폭로가 조직의 전통과 자긍심이 만들어 낸 ‘국가를 위한 양심선언’이었다고 믿는다. 그런 기재부 관료를 보는 이 정부의 시선은 그러나 차갑기 짝이 없다. 정부는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예산을 펑펑 못 쓰게 막는 관료를 ‘관료주의’ ‘복지부동’으로 몰았다. 급기야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홍남기 부총리에게 “국가 채무비율 40%가 마지노선이라는 근거가 뭐냐”며 재정확대를 주문했다. 홍 부총리는 보름 뒤 “2022년 국가 채무비율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45%. 971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화답했다. 지난달 초 중기재정운용계획을 내놓으면서 GDP 대비 41.6%, 898조원으로 추산했던 것을 대통령 발언 후 보름 만에 70조원 넘게 늘린 것이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다.
 
국고 지기의 자긍심이 무너지면 나라 곳간도 무너진다. 홍 부총리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대통령에게 되레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수출이 줄고 성장이 둔화하고 있으며 세금은 덜 걷히고 저출산·고령화 속도는 빠르다. 통일에 대비해야 하고 연금을 국가가 지급 보장해야 할 수도 있다. 공무원을 늘리고 수십조원의 현찰을 뿌려대는 통에 올해부터 통합재정수지가 적자로 돌아선다. 4월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섰다. 7년 만에 처음이다. 이런 추세면 사상 첫 쌍둥이 적자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지금은 되레 재정을 더 아끼고 더 제대로 써야 할 때다. 미래 세대를 위해.”
 
하기야 애초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홍 부총리는 안팎에서 ‘예스맨’ ‘패싱맨’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추경·증권거래세·신용카드 소득공제 등 주요 사안에서 대통령·여당의 한 마디에 자신의 입장을 번복했다. 기재부 내에선 “버티는 시늉도 안 하는 통에 청와대가 되레 부담스러워 한다”는 믿지 못할 소문까지 돈다. 그런 그에게 곳간지기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나라곳간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정부에 행인지 불행인지, 이틀 전 한국은행은 국민계정 기준연도를 변경했다. 계산 방법을 바꾸면서 GDP가 숫자상 111조원 늘어나 지난해 국가부채 비율도 38.2%→35.9%로 떨어졌다. 산술적으로 골대가 움직인 것인데, 이를 빌미로 정부가 “더 퍼주자”고 나설까 봐 벌써 걱정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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