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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수제 맥주를 마시며 규제를 곱씹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야외에서 한잔하기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요즘처럼 청량한 초여름 밤이면 쌉싸래한 뒷맛의 페일 에일이나 상큼한 과일 향의 밀맥주를 골라 마시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게 비단 저 혼자만은 아니겠지요?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러하시다면 아마 제가 그 행복감에 100만 분의 1쯤은 기여한 듯합니다.
 
뜬금없는 생색의 근거가 뭐냐고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실지 모르나 200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엔 맥주 제조 업체가 단 두 곳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경제부 기자였던 저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에서 겪는 고충을 취재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마실 만한 맥주가 없다”는 불만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 겁니다. 대형 맥주 회사뿐 아니라 동네 주점이나 식당에서 각양각색의 맥주를 만들어 파는 유럽에 비해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는 얘기였죠.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담당 공무원에게 전하며 대규모 탱크를 갖춘 기업만 맥주 공장을 세울 수 있게 한 낡은 세법을 고칠 때가 됐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침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즈음이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명분에 힘이 실렸고 마침내 난공불락 같던 규제가 풀리게 됐습니다. 공식 발표 전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저는 애주가의 한 사람으로선 매우 뜻깊은 단독 보도도 할 수 있었죠. ‘주점에서 직접 만든 마이크로(micro) 맥주 나온다’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여기서 ‘마이크로 맥주’가 바로 수제 맥주를 일컫는 말입니다.
 
요사이 수제 맥주가 전성기를 맞게 된 건 이후로 2014년과 2018년에 이뤄진 추가 규제 완화 덕이 큽니다. 소규모 매장에서 만든 수제 맥주를 마트나 편의점, 축제 현장에서도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되며 창업과 투자가 줄을 잇게 된 겁니다. 최근 이 업계에 뛰어들어 꿈을 좇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난 걸 보면서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만약 정부가 탈세 방지와 기존 업체 보호라는 논리를 고집해 끝까지 규제를 풀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어서 말입니다.
 
해묵은 취재 뒷얘기까지 들먹인 건 규제가 우리 젊은이들의 손발을 꽁꽁 묶고 있는 걸 실감케 하는 볼멘소리를 잇달아 접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얼마 전 한 회의에서 만난 대기업 회장 A씨에게선 국내 명문대 학생들의 눈물겨운 스타트업 창업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알파고가 수많은 고수의 기보를 학습해 바둑계를 평정한 데서 영감을 얻은 이 학생들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투자 사업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AI에게 워런 버핏 등 세계적 고수들의 투자 패턴을 학습시킨 뒤 고객들의 돈을 굴리게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허가를 얻기 위해 금융 당국의 문을 두드린 이들에게 돌아온 건 날벼락 같은 거절의 말이었습니다. “은행법 적용도 안 되고 증권 관련 법 대상도 아니라 골치 아프니 그냥 해외에 나가서 창업하면 안 되겠나.”
 
그런가 하면 대학교수 B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역군인 빅데이터 분석가 양성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방대한 정보 속에서 트렌드를 읽어내 각종 의사 결정을 돕는 빅데이터 분석가는 ‘21세기의 가장 섹시한 직업’(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이라 불립니다. AI 탓에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와중에 이 직종은 오히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릴 만큼 전망이 밝습니다. 문제는 해외 각국과 달리 개인 정보와 관련된 규제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모두 가린 이른바 비식별 정보조차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는 현실에선 제대로 된 빅데이터 활용은 꿈도 꾸기 어렵답니다. 제자들 보기 안쓰럽다며 B씨가 한 말이 뼈를 때립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이미 우리 정보를 죄다 가져다 쓰는데 국내에서만 금지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규제 완화가 곧 일자리라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 지겨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매달 점검 회의까지 하며 챙기겠다고 일찌감치 공언했는데도 참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섣불리 팔 걷고 나섰다가 나중에 경을 칠까 두려워서 공무원들이 도통 움직이질 않는다고들 합니다. 정쟁에 빠져 손 놓고 있는 국회도 무책임한 건 마찬가지죠. 물론 모든 규제를 풀자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시대착오적인 규제, 글로벌 기업과의 역차별 규제마저 그냥 놔두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청년 실업이 사상 최악이라는 이때, 언제까지 “기다리면 다 잘 될 거야”라며 희망고문만 해야 할까요.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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