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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혁의 퍼스펙티브] 우리에겐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
1992년 10월 제14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덩샤오핑.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시장경제 제도를 접목하는 덩샤오핑의 지도 노선을 중국 공산당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 [중앙포토]

1992년 10월 제14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덩샤오핑.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시장경제 제도를 접목하는 덩샤오핑의 지도 노선을 중국 공산당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 [중앙포토]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류사오치 등의 동지와 같이 마오쩌둥 시대를 보냈다. 그리고 후야오방·자오쯔양·장쩌민 등 심복 참모들을 키웠다. 후야오방이 먼저 갔고 자오쯔양은 1987년 천안문 사태 이후 물러났다. 덩샤오핑은 마지막 남은 히든카드 장쩌민을 후계자로 만든 뒤 생을 마감했다.
 

덩샤오핑, 과감히 기존노선 벗어나
당면한 현실 인정하고 살길 열어
이념에 편향된 경제정책 노선
그만두지 않으면 쇠락의 길 걸어

나는 86년부터 중국 국제우호연락회(우호연)와 인연을 맺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전에 우호연 부회장이자 덩샤오핑의 막내딸인 덩용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만난 가장 출중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덩용은 사실상 덩샤오핑의 유일한 대변인이었다. 당시 우호연 회장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미·중 관계 문호를 연 황화 전 외무부장이었다. 진리 부회장과 웨펑 부회장이 실무 책임자였다. 나는 빠른 속도로 우호연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양국 관계가 적대에서 친선으로 변한 데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중국의 정치 노선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이 오랫동안 마오쩌둥 체제에 묶여있던 때에 대한민국은 자유 세계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박정희 대통령의 성공적 실적을 목격하고 가속하였다. 한국은 정치는 통제 체제이면서도 경제는 자본주의적 자유시장주의로 성장했다는 이율배반적 사실에 덩샤오핑은 크게 감명받았다.
 
그때까지 수년간 중국의 기자·학자들이 우리나라를 탐방한 뒤 보고서를 덩샤오핑에게 제출해왔다. 88년 보고서는 한국이 이미 학생·노동자 봉기로 사회주의 국가로 갈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덩샤오핑의 지시로 한·중 수교가 급물살을 탔다. 덩샤오핑은 『박정희 평전』을 만들어 모든 고급 관료에게 4번 이상씩 읽게 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이 빛을 발했다. 노 대통령은 중국 정부가 천안문 사태를 무력 진압한 뒤 자유 세계의 비난이 쏟아질 때 특사(박철언 당시 안기부장 특보)를 중국에 파견하고 덩샤오핑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그 친서는 덩샤오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때 동행한 나는 중국 측으로부터 친서 내용을 설명 듣고 깜짝 놀랐다. 그 후 한·중 수교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며 당초 예상보다 1년이나 앞당겨졌다.
 
덩샤오핑은 94년 초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해 장쩌민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에게 중국이 안보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김일성의 동의를 받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향후 70년은 미국과 싸우지 말고 돈 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중국이 아주 잘하면 200년 후에나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공산주의가 현존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덩샤오핑은 97년 2월 서거하기까지 2년여 동안 내 아내가 한국에서 보낸 사과와 배를 매 끼니 먹었다. 그것은 중국에 과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선과 신뢰를 표시한 것이었다. 너무도 친밀한 양국 관계였다. 지금은 덩용 여사를 제외한 모든 인사가 타계했다. 친하게 지낸 덩용 여사와도 교신이 끊어졌다. 이 시점에서 지난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여 이성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남북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
 
1992년 1월 톈지윈 중국 부총리(오른쪽)를 만난 장치혁 전 회장. 이 자리에서 톈지윈 부총리는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1992년 1월 톈지윈 중국 부총리(오른쪽)를 만난 장치혁 전 회장. 이 자리에서 톈지윈 부총리는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20세기와는 너무도 다른 21세기를 살고 있다. 한·중 관계 정립도 21세기 글로벌 자유시장 네트워크 속에서 중국도 한국도 다 연결돼 살고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전략적 국제 체제의 리더는 역시 미국이다. 미국은 향후 200년의 전략을 짜 놓고 천체의 원리처럼 운행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무역분쟁도 미국이 주도권을 쥔 채 마감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 경쟁에서 200년의 장기 전략을 기조로 무역·금융·연구개발·군사안보·에너지 분야 등에서 우월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친미나 친중·친일을 따질 때가 아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서 각국이 실리주의를 좇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체성도 이러한 원리 안에 있는 현실을 직시한 가운데 미래 진로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를 보자. 현실을 빨리 읽은 일본은 구조적으로 미국과 같은 노선상에 서 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진주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지휘한 일본 대본영 육해(공) 작전참모였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부회장을 70년대 초 만나 한동안 가깝게 지냈다. 그는 당시 스마트한 신사로 자유민주주의·정보화·세계화에 앞장선 인물이 돼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많은 전략적 사고를 배웠다.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류조는 아시아 평화가 세계 평화로 발전하는 자유경제 시장 정책을 실현하는데, 일본이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신념으로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에게 북한의 금강산 개발도 권유했다. 일본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오늘의 아베 정권이 어떤 기반 위에서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주체성을 지키면서 세계의 흐름에 역류하지 않고 순응하며 발전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국제 정세를 오판하고 전쟁에 뛰어들어 원자폭탄을 맞고 패전으로 망했던 뼈아픈 교훈이 오늘날 일본을 자유민주국가·자유시장·세계화의 선두 주자가 되게 하였다.
 
대한민국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진로로 가고 있는가. 북한은 세계와 동떨어진 낡은 주체사상에 빠져있다. 이런 지경에서 어떻게 남북 화합과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친선을 도모해야 우리의 주체성을 객관적으로 지킬 수 있다. 이미 성공한 나라들에서 배워야 한다. 작은 나라이지만 스위스·네덜란드·핀란드·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벨기에 등은 자유와 번영·평화를 성취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주체 국가다. 과거는 교훈으로 삼되 미래의 진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
 
세계의 흐름을 벗어난 외톨이 자주성은 생존 수단이 될 수 없다.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당당하게 적응하며 남북 관계도 발전시켜야 한다. 또 고마움을 모르는 눈으로 바른 미래를 볼 수 없다.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미·일이 상호 승인한 밀약)이나 일제 36년의 식민지 침략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미국의 도움과 일본의 산업화 도움, 특히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때 일본 자민당 정부의 도움을 잊지 말고 밝은 미래를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
 
위기에 처한 현실을 바로 알아야 앞길이 열린다. 현실을 외면한 채 이념에 편향된 경제정책 노선을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됐다. 사람은 자기의 기존 지식이나 소신을 꺾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덩샤오핑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과감히 기존 노선을 벗어나 당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살길을 열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자. 역사의 흐름과 미래는 한 줄기이다. 현실·실존·실체가 그 핵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쇠락과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 분열과 당쟁으로 망한 대한제국을 교훈으로 삼아 통합과 실사구시 정신을 살려야  21세기 선진 국가로 약진할 수 있다. 
 
◆장치혁 전 회장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역사학자 장도빈 선생과 독립운동가 김숙자 여사 사이에서 1932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66년 고려합섬(현 롯데케미칼)을 창업해 한국 굴지의 섬유·석유화학 기업으로 키웠다. 전경련 부회장과 경총 부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91년부터 대북 경협 사업을 하며 김영삼 정부 때 금강산 유람선 사업과 김대중 정부 때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92년 한·중 수교에 크게 기여하며 그해 11월 수교훈장 숭례장을 받았다. 

 
장치혁 전 고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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