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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세요. 눈 부시게" 가슴을 때린 김혜자의 이 말

기자
김현주 사진 김현주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14)
JTBC 월화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김혜자 씨는 갑자기 노인이 돼버린 25세 혜자(한지민)의 마음을 코믹하고도 절절하게 그려낸다. 그는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이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를 읊어주었다. [사진 JTBC]

JTBC 월화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김혜자 씨는 갑자기 노인이 돼버린 25세 혜자(한지민)의 마음을 코믹하고도 절절하게 그려낸다. 그는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이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를 읊어주었다. [사진 JTBC]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대사다. 드라마 속 내레이션을 들었을 때 뭉클했던 마음. 김혜자 씨가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의 수상 소감으로 다시 읽어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다섯 청춘과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의 삶을 연결해 시간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한 이 드라마는, 방영 중에도 이미 많은 이들에게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인생의 희로애락 견뎌낸 김혜자 씨 얼굴
드라마 속에서 김혜자 씨의 얼굴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내 마음을 흔든 다른 얼굴도 있다. 바로 나한의 얼굴이다. 나한의 얼굴에서 인생을 보았다. [사진 김현주]

드라마 속에서 김혜자 씨의 얼굴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내 마음을 흔든 다른 얼굴도 있다. 바로 나한의 얼굴이다. 나한의 얼굴에서 인생을 보았다. [사진 김현주]

 
방송을 챙겨보며 감탄했던 건 김혜자 씨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표정과 눈빛으로 기쁨과 슬픔, 노여움, 공감, 사랑을 전달하는 순간 이해하지 못할 상황과 공감하지 못할 감정은 없었다(‘타임 리프’라는 비현실적 전개였지만 말이다). 머무는 시간은 다르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그런 슬픔과 애틋함과 기쁨이 존재하는 것이 인생이란 걸 설득시킨다고 할까.
 
특히 마지막 대사 이후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코끝이 시큰할 정도의 감동이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견뎌내고 살아낸 얼굴, 그래서 깨달은 얼굴! 나 역시 삶이 얼굴에 묻기 시작하는 나이에 들어선지라 배우의 표정이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내 마음을 흔든 또 다른 얼굴도 있다.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국립중앙박물관, 4월 29일~6월 13일)’에서 마주한 나한의 얼굴. 그들의 표정 역시 나이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순간을 보여주었다.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arhan’을 한자로 음역해 만든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부처가 입멸한 뒤 그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가 바로 오백나한이다.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 신에 근접했으나 본질적으로 인간인 나한들. 그래서 나한은 ‘내 안에 존재하는 깨달은 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은 삶이란 ‘저 멀리 아득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천진하게 웃고, 좀 더 느긋하게 진지하고, 좀 더 여유 있게 인상 쓰고, 좀 더 편안하게 슬플 수 있는’ 삶을 말한다.
 
기쁨과 즐거움, 화와 슬픔, 공감의 표정을 한 나한상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사진 김현주]

기쁨과 즐거움, 화와 슬픔, 공감의 표정을 한 나한상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사진 김현주]

 
깨달은 자들의 표정을 만나 볼 수 있는 자리라니! 이번 전시는 2001년 강원도 영월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나한을 모아 구성한 것으로 작년 춘천박물관에서 이미 3만여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울에서 이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박물관으로 향했다. 삶의 여러 표정을 나한을 통해 직접 목도하고 싶기도 했다.
 
어둡게 떨어진 조명 사이로 배치된 32구 나한상을 지나, 작가 김승영의 작품이 설치된 방으로 들어갔다. 스피커 700여 개를 탑처럼 쌓아 도시의 빌딩 숲처럼 만들어 놓은 이곳에는 또 다른 나한상 29구가 놓여 있었는데, 그 한쪽에 큰 거울 하나가 마련되어 있다. ‘당신 마음속의 나한을 보세요’라는 문구가 쓰인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어쩐지 슬퍼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슬픔’을 표현한 나한의 얼굴이 있었다. 나의 표정은 나한과 달랐다.
 
슬픔을 표현한 그 나한상은 단순히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사색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성찰하는 슬픔이랄까. 나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소개 글에 적힌 ‘편안하게 슬플 수 있는 삶’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받아들이면 달라질 수 있다!
 
‘편안하게 슬플 수 있는’ 나한의 얼굴
마음속 감정을 얼굴 가득 천진하게 드러내는 나한들. 이들에 둘러싸여 나를 뒤돌아보는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불가의 진리를 깨우친 성자 ‘나한’의 표정을 보면서 나의 표정과 마음을 돌아볼 기회였고,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존귀한 사람이라고 마음을 열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을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김혜자 씨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며 나한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김현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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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