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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칼퇴근 판사에게 재판받고 싶다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재판을 방청하다 보면 가끔 여우와 두루미의 식사를 목격할 때가 있다. 여우는 납작한 접시에, 두루미는 입이 긴 병에 음식을 담아 서로에게 건네 아무도 먹지 못했다는 그 우화 말이다.
 
“인정신문 시작합니다. 직업이 어떻게 됩니까?”란 판사의 질문에, 일하는 식당 이름을 말한 피고인이 있었다. “조개000입니다.” 먹자골목에서 한두 번쯤 볼 수 있었을 재치있는 상호였지만, 메뉴로 보나 가격대로 보나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주변에선 보기 힘든 음식점이었다.  판사는 어리둥절했다. ‘조개000’이 음식점 이름이란 걸, 그게 곧 그가 ‘요식업 종사자’란 뜻인 걸, 판사는 몰랐다. 둘은 다른 그릇에 밥을 먹은 지 너무 오래됐다. 변호사란 통역사를 쓰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사기와 횡령 혐의로 구속된 한 피고인에게 판결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자신을 고소인이라고 소개한 여성이 방청석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저희가 합의를 하려고 하는데 선처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돌아온 판사의 말. “이 사건에서 합의는 중요한 양형요소가 아닙니다.” 판사는 ‘양형요소’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말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성은 끝내 판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중요한 양형요소가 아니라니까요!”를 세 번째 듣고서야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일행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뭐라고 한 거야? 나 말하지 말래?”
 
칼퇴근 판사에게 재판받고 싶다. 명문고-법대-고시촌-연수원으로 이어졌던 삶의 터널을 계속해서 법원과 집 사이에만 뚫어놓고 살다 보면 일반의 언어와 생각에서 멀어져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판결문의 단골 문구처럼 ‘사회통념에 비추어’ ‘피해자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 입장에서’ 볼 수 있으려면 판사는 사회와 닮아 있어야 한다. 당사자가 못 알아듣는 재판, “피고인 말고 변호인이 말하세요!” 하는 재판은 법조인들의 대화지 재판이 아니다. 안 먹어본 것도 먹어보고, 안 가본 곳도 가 보고, 볼 일 없던 사람들과도 대화해 보며, 판사 아닌 일반인의 삶을 살아보려면 칼퇴근부터 급하다.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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