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서울서 싼 X은 서울이 치워라"···일산의 분노

3기 신도시 역풍 부는 서울 서북권 신도시
경기도 일산과 운정 신도시 주민들이 25일 저녁 고양시 일산동구청 앞에서 3기 신도시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근처 김현미 국토부 장관 지역구 사무실 앞까지 가두행진을 했다. [연합뉴스]

경기도 일산과 운정 신도시 주민들이 25일 저녁 고양시 일산동구청 앞에서 3기 신도시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근처 김현미 국토부 장관 지역구 사무실 앞까지 가두행진을 했다. [연합뉴스]

“최근 발표된 경기도 철도교통망 계획에 따르면 분당에 3개의 철도가 배정된 반면 고양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서울에서 뺨 맞고, 분당에서 아양 떨고, 일산에 X을 투척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고양이 탈로 얼굴을 가린 여성의 열띤 목소리는 청중들의 ‘옳소!’ 함성으로 덮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주말(5월 18일) 일산 주엽 공원은 열기로 달아올랐다. 1, 2기 신도시인 고양 일산신도시, 파주 운정신도시, 인천 검단신도시 주민들의 연합 집회 현장이다. 연단에 선 사람은 인터넷 커뮤니티 ‘일산신도시연합회’(일산연)의 운영진 ‘날아라 후곡’(닉네임)이다. 정부가 지난 7일 3기 신도시 입지로 고양시 창릉동을 발표하자 다음날 바로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현재 6000명 넘는 회원이 가입한 상태다.

 
이날 집회는 ‘일산연’이 조직한 두 번째 시위다. 엿새 전 열린 1차 집회의 열 배 넘는 규모다. 주최 측은 참가자가 1만명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찰 추산은 절반에 못 미친다. 어느 숫자가 맞든 간에 신도시 건설 30년 만에 처음 보는 풍경이다. 시민들의 손에는 ‘3기 신도시 OUT’ ‘도면 유출 3기 신도시 원천 무효’ ‘고양시 시장 소환’ 구호가 적힌 팻말과 풍선이 들려 있었다.

 
정부가 3기 신도시 계획을 발표한 이후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수그러들 줄 모른다. 3기 신도시는 서울에서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급등하는 서울 집값을 잡기 위해 서울 접근성을 가장 먼저 고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1, 2기 신도시다. 집값은 떨어지고 출퇴근길은 더 혼잡해질 거라는 우려가 높다. 특히 서울 경계에서 1㎞ 거리인 고양 창릉 신도시 입지가 발표되자 서울에서 대략 10㎞ 떨어진 일산신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2차 집회 일주일 뒤인 25일에도 일산동구청 앞에서 3차 주민 집회가 열렸다.

 
‘일산연’ 카페에는 정부에 대한 성토로 가득했다. 게시판에는 “앞으로 고양시에 들어올 아파트는 창릉 신도시 3만8000세대를 포함해 탄현·장항 등 총 9만여 세대가 예정돼 있다”며 “서울과 더 가까운 입지에 활발한 교통망이 만들어지는 신도시를 놔두고 20년 이상 된 일산 아파트에 누가 이사 오려 하겠느냐”는 글이 올라와 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회가 행여나 ‘중산층의 집단 이기주의’로 비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집회 현장 주변의 한 50대 남성은 “일산신도시가 만들어질 때부터 죽 이곳에서 살았다”며 “점점 나빠지는 생활 여건에 항의하기 위해 나왔지, 집값은 크게 관심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부인의 말이 차라리 솔직해 보였다. “어휴, 이제 집 팔고 서울 들어갈 수도 없어요. 창릉 신도시 들어서면 더 떨어지겠지요.”

 
주민들의 분노는 서울 강남권 신도시보다 열악한 사회 및 교통 인프라가 수십년간 누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수도권 집값 안정을 위해 일산이 희생양이 돼왔다는 피해의식까지 겹쳤다. 일산 건설 이후 고양시에는 삼송지구, 서정지구, 원흥지구, 향동지구 등 많은 택지가 들어섰다. 일산의 배후에도 2기 신도시인 파주 운정지구가 현재 일부 미분양 상태로 있다. 인근의 한 부동산 중개인은 “3기 신도시 발표로 일산 아파트가 1억원 떨어졌다는 것은 가짜 뉴스”라면서도 “하지만 그러잖아도 드물던 거래가 뚝 끊어진 것은 맞다”고 말했다.

 
채수천 고양시아파트입주자대표협의회장은 “일산 주변도 문제지만, 내부도 엄청난 물량 과잉 상태”라고 지적했다. 현재 일산에는 동구 장항동 일대에 예정된 행복주택 6500여 가구, 영상밸리 4000가구, 킨텍스 9000가구 등 모두 2만8500가구 입주가 기다리고 있다. 채 회장은 “이들이 모두 들어서면 일산의 명물인 호수공원 주변의 경관이 나빠지는 등 시민들의 주거 환경은 크게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분노는 정치권으로 향하고 있다. ‘일산연’ 카페에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정책 문제인만큼 정치 중립을 어기는 회원은 탈퇴시키겠다”는 경고가 떠 있다. 하지만 김현미 국토부 장관과 민주당 소속 이재준 고양시장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거센 것은 어쩔 수 없다. 일산서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김현미 장관이 부랴부랴 일산 지역 교통망 확충 방안을 발표했지만 반응은 싸늘하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노선 조기 개통, 인천지하철 2호선의 일산 연결, 대곡~소사 복선전철 연장 운행 등이 주 내용이다. 하지만 일산에 미칠 효과도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재탕에 불과하다는 주민들의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각 정당의 정치적 셈법도 엇갈린다.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쪽은 자유한국당이다. 20대 국회에서 일산 두 지역구는 물론이고, 고양시 4개 선거구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태세다. 반면 여당은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일산연’은 1차 집회 당시 고양시 의원 모두에게 참석을 요청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민주당과 정의당 소속 시의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원로급 주민단체 관계자는 “겉으로는 정치색을 배제하자고 하지만, 우리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여당이 주민 정서를 너무 모른다고 성토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주민들의 소외감과 박탈감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겹치며 공포감으로 바뀌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일본 경제 팽창 시기에 건설됐다가 지금은 비어가고 있는 도쿄 근처 다마(多摩) 신도시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민들의 불안이 지나친 건 아닐까. 김원중 부동산학 박사(건국대 겸임교수)는 “아파트 수분양자의 70~80%는 부지 개발지 반경 8㎞ 이내 주민들이라는 분석이 있다”며 “이런 기준에 비춰보면 3기 신도시 입주자들 상당수는 사업지 인근 주민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하고 있다. 3기 신도시가 서울 강남 4구 및 마포·용산·성동의 집값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주변 기존 신도시 주민 흡수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관측인 셈이다.

 
일산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3기 신도시 철회 계획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미 토지거래 허가 등 재산권 행사 제한에 들어간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릴 경우 더 큰 역풍이 예상된다. 그러나 일산 주민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중산층 이기주의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지은 지 30년 다 되어가는 1기 신도시는 이미 노화가 시작됐다. 인구는 정점을 지나고 있는데 신도시를 자꾸 지어 외연만 확장하는 도시개발이 맞는지 고민해야 한다. 집회 현장에서는 “그린벨트를 풀든, 초고층 개발을 하든, 서울에서 싼 X은 서울에서 치워라”는 구호가 들렸다.
 
한때는 ‘천하제일 일산’이었는데…
일산과 분당 주거 환경을 비교한 2000년 12월 15일자 중앙일보 지면.

일산과 분당 주거 환경을 비교한 2000년 12월 15일자 중앙일보 지면.

일산 주민들의 소외감과 박탈감은 1기 신도시 ‘동기’인 분당신도시와 비교했을 때 더 커진다. 한 주민은 “입주 초기 때만 하더라도 ‘천당 아래 분당’ ‘천하제일 일산’이라는 식으로 두 도시를 비교하는 기사가 나오곤 했다. 지금은 일산 집값이 분당의 반도 안 된다는 기사만 나온다”고 씁쓸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산과 분당의 집값 격차는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부동산뱅크에 따르면 1993년 초 1억2000만원가량이던 일산 강촌마을 전용 105㎡ 아파트 시세는 현재 4억원 언저리에 형성돼있다. 반면, 1억5000만원 정도였던 분당 서현동 삼성한신(107㎡) 시세는 현재 9억~10억원 정도다. 재작년과 작년 수도권 아파트값 상승 행진에서도 일산은 소외되다시피 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최근 2년간 서울과 분당의 아파트값이 각각 9%와 15% 올랐다. 반면 일산동구와 서구 아파트값은 오히려 1~2%가량 떨어졌다.

 
두 신도시의 집값 격차는 자족 기능과 교통망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분당은 판교테크노밸리 같은 업무단지가 자리 잡은 반면 일산은 난개발에 가까운 주변 택지개발로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분당은 신분당선 개통 등으로 서울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일산은 신도시 건설 이후 제 2자유로 개통 외에는 큰 개선이 없었다.
 
이현상 논설위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