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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되려는 ‘방랑 기능공’이 독일 기술강국 이끌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11>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전형적인 독일식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이렇게 독일인들은 ‘방랑’한다. [사진 윤광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전형적인 독일식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이렇게 독일인들은 ‘방랑’한다. [사진 윤광준]

그로피우스는 “예술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일까.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만 하더라도 그로피우스에게 구체적인 교육프로그램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예술을 인민에게로’와 같은 전후 혁명기의 거친 구호들뿐이었다. 바우하우스 설립 전까지의 행보도 좌충우돌이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그의 활동에 ‘인민’은 없었다. 귀족들의 호화저택이나 보다 효율적인 공장을 설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기병대 장교로 즉시 자원입대할 정도로 애국적인 프로이센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실행력’이다. 다들 주저할 때, 그는 실행했다. 변혁기에는 행동하는 사람이 무조건 임자다!
 
그로피우스는 ‘수공예’를 가르치려 했다. ‘예술교육’과 관련해 달리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테지우스를 통해 전해 들었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과 독일의 전통적 도제제도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로피우스는 새로 세워질 바우하우스 선생들을 ‘마이스터(Meister)’라고 부르도록 했다. ‘마이스터’라는 개념 또한 독일의 전통적 도제제도에서 가져온 것이다.
 
도제-기능공-마이스터 3단계 교육체계
 
라이오넬 파이닝거(가장 왼쪽 인물). [사진 윤광준]

라이오넬 파이닝거(가장 왼쪽 인물). [사진 윤광준]

중세 길드로부터 시작된 독일 수공업의 교육체계는 3단계다. 기술을 배우려면 무조건 장인 밑에 들어가 수년을 배워야 한다. 이 때 장인은 ‘마이스터’라 불렸고, 장인 밑으로 기술을 배우려 들어온 견습생은 ‘레어링에(Lehrlinge·도제)’라고 불렸다. 도제는 장인의 집에 들어가 가족처럼 지내며 숙식을 함께한다. 물론 급여는 없다. 오히려 수업료를 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녀가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당시 서민사회에서 도제와 마이스터 딸의 사랑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제’ 기간이 지나면 견습생은 마이스터의 집을 떠나야 했다.
 
일정기간 기술을 익힌 도제는 해당 지역의 수공업단체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게젤레(Geselle·기능공)’가 되었다. 기능공이 되면 이제까지 지냈던 마이스터의 집을 떠나야 한다. 수년간 같은 분야의 기술을 가진 다른 지역의 마이스터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익힌 기술과 비교하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방랑의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독립된 장인, 즉 ‘마이스터’가 될 수 있었다.
 
파이닝거는 바이마르 입구의 작은 마을 ‘겔메로다’의 교회를 즐겨 그렸다. [사진 윤광준]

파이닝거는 바이마르 입구의 작은 마을 ‘겔메로다’의 교회를 즐겨 그렸다. [사진 윤광준]

오늘날까지도 독일이 ‘기술의 나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 ‘방랑하는 기능공(Wandergeselle)’들 덕분이다. 이들이야말로 당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의 ‘편집자’였다. 독일의 장인문화는 이 같은 기능공들의 방랑을 통한 ‘지식편집’을 통해 끊임없이 계승되고 발전됐다. ‘방랑 기능공’은 영어로는 그냥 ‘여행자(journeyman)’라고 번역된다. 여행의 목적이 원래 ‘학습’ 또는 ‘공부’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은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슬픔이 동반됐다. 기능공들은 이제까지 사랑했던 마이스터의 딸과 이별해야만 했다. 그 절절한 슬픔이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Winterreise)’에 녹아 있다. 사랑하는 처녀와 헤어져 먼 길을 떠나는 기능공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그리움과 슬픔에 주저앉는다. 날카로운 돌로 그녀의 이름을 얼음 위에 새긴다. ‘봄이 되면 이 얼음이 녹아 내가 방금 떠나온 그녀의 마을로 흘러가리라’며 울며 노래한다. 구구절절 궁상도 그런 궁상이 없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노래다.
 
독일의 기능공들이 그렇게 숲속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방랑(Wanderung)’하는 동안, 독일보다 앞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이뤘던 프랑스인들은 도시를 ‘산책’했다. 프랑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뤄진 오스만 남작의 파리 도시구조개혁 이후, 파리는 걷기에 너무 즐거운 도시가 되었다. 파리지엔들은 상품자본주의가 화려하게 펼쳐지던 도심을 걸으며 기꺼이 ‘플라네르(Flàneur·산책자)’가 되었다. 보들레르가 노래하고 발터 벤야민이 기꺼이 방법론적으로 흉내 냈던 파리의 ‘산책자’들은 그렇게 원근법적으로 펼쳐진 거리에서 부르주아의 꿈을 꾸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인들은 숲속을 마냥 걷는 트래킹, 즉 방랑을 즐긴다. 프랑스인들은 도로의 노천카페 사이를 산책하며 쇼 윈도우를 구경한다.
 
‘겔메로다’ 교회의 실제 모습. 2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교회다. [사진 윤광준]

‘겔메로다’ 교회의 실제 모습. 2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교회다. [사진 윤광준]

그로피우스가 ‘도제-기능공-장인’으로 이어지는 독일 수공업 교육체계를 본떠 새로운 예술학교로서의 바우하우스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낡은 중세의 장인제도를 어떻게 근대의 교육체계로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플랜이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선언적 교육프로그램을 체계화할 수 있는 예술교육전문가도 그로피우스 주위에는 없었다. 이때 알마 말러가 요하네스 이텐을 추천했다(바우하우스가 개교할 때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최악은 아니었다. ‘동지적 의리’는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새로 개교했지만 그로피우스는 기존의 작센대공 미술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권한으로 초빙할 수 있었던 선생은 단 세 명뿐이었다. 더 이상의 예산은 지원되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아돌프 마이어조차 교원으로 선발할 수 없었다. 마이어는 행정 보조역할을 맡아 온갖 잡무를 처리했다. 그 세 명은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1889~1981), 그리고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1888~1967)이었다.
 
설립이 결정된 후, 그로피우스는 제일 먼저 파이닝거를 교사로 초빙했다. ‘11월 그룹’ 결성 당시 처음 만나 의기투합한 둘은 이후 ‘예술노동평의회’ 결성에도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훗날 바우하우스가 체계를 갖췄을 때,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바우하우스의 선생들은 대부분 30대였다. 파이닝거는 칸딘스키와 더불어 시니어그룹에 속했다. 이 둘은 바우하우스 내부의 갈등과 반목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특히 부드러운 성격의 파이닝거는 묵묵히 그로피우스를 도왔다.
 
파이닝거는 뉴욕으로 이민 간 독일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성악가였다. 파이닝거 또한 피아노를 즐겨 연주했고 작곡도 했다. 그는 청소년기에 독일로 건너 와 미술을 공부했다. 졸업 후 잡지에 풍자화를 연재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 베를린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주로 활동하던 ‘슈투름(Sturm)’화랑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폭풍’을 뜻하는 ‘슈투름’은 화랑에서 펴내는 ‘잡지’의 이름이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산책’하며 부르주아 꿈꿔
 
당시 베를린 지식인사회에서 ‘슈투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로피우스가 후에 바우하우스의 선생으로 초빙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슈투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파이닝거가 바우하우스의 초청에 기꺼이 응했던 것은 전쟁 전, 그의 둘째 부인이 되는 율리아 베르크를 바이마르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마르 입구의 작은 마을 ‘겔메로다(Gelmeroda)’의 작은 교회를 즐겨 그렸다. 파이닝거의 수많은 실험적 작품들로 인해 이 볼품없고 작은 마을교회는 무척 유명해졌다.
 
파이닝거 초청은 바이마르 관료와 예술가들의 큰 반발을 불렀다. 예술과 산업이 결합된 ‘수공예 학교’를 복원한다면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첫 번째 선생으로 초빙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사람들의 비판은 옳았다. 사실 파이닝거는 실험적 시도에 몰두한 화가였다. 예술 교육에는 문외한이었다. 파이닝거 다음으로 초빙한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또한 예술 교육과는 전혀 관계없었다. 그 또한 아방가르드 조각가였다. 그로피우스는 전통적 아카데미 예술에 반기를 든 마르크스를 1914년 쾰른에서 열린 독일 공작연맹 전시회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 또한 ‘11월 그룹’과 ‘예술노동평의회’의 멤버가 되었다.
 
예술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요하네스 이텐뿐이었다. 몇 년 후, 그로피우스는 이텐과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수공예’라는 낡은 예술교육론을 폐기처분하게 된다. 그리고 ‘추상(Abstraktion)’과 ‘구성(Konstruktion)’이라는 창조적 편집 방법론을 바우하우스의 교육프로그램으로 세워나가게 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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