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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탄 꽝 꽈르르”…핵무기 과장된 수사 동원된 북한 동시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동인(動因)은 정치이고 정치인들이 내리는 정책 결정들이다. 그러나 많은 것은 정치 선동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다보면 배불리 먹은 농부들이 땅을 치면서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며, 임금의 힘이 거기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말했다는, 또는 임금이 공손한 자세로 남면(南面)하고 앉아있는 것만으로 크게 하는 일이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요순(堯舜)시대의 이야기가 그립게 된다. 정치의 근본은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평온함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가 나라를 바르게 유지하여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쌓인 잘못들을 시정하고, 더 나아가 바른 개혁을 시도하여야 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폐청산이나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정책은 그 전체 맥락이 명확하지 못하여, 크게 설득력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부분적인 사실에 관계되는 어떤 방안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프로그램은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전체적인 삶의 비전으로 하여 호소력을 갖는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양축이, 축 하나하나로는 추구될 수 있는 정당한  목표이지만,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추구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전에 지적한 바 있다. 사실적 과정의 설득력은 비전의 호소력의 기초가 된다. 좌측통행을 우측통행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일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통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비슷한 일로 남발되는 개명(改名), 개칭(改稱)의 명령들도 들어 볼 수 있다.
  
남북관계 근본부터 생각해 봐야
 
최근에 여야 간의 언어 싸움, 소위 막말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 싸움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정치 사건이다. 이러한 것들은 심리적 만족감, 당사자들에게도 그러하지만, ‘분노’와 ‘격분’에서 정치 참여의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만족감을 줄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의 관점에서는, 심각한 공공 공간에서 말싸움이 정치적 분노의 주제가 된다는 것은 심각한 이슈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여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 상황의 증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다만 적대하면서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사회의 인간적 품격을 유지하는 일이 된다고 할 수는 있다. 중세에, 또는 20세기 초까지도 유지된 서양의 결투하는 폐습에서, 죽이고 살리는 싸움판에서도 지키는 예의와 공정성의 기율이 결투를 공인(公認)된 풍습이 되게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남북관계이다. 그것을 어떻게 평화스러운 것이 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 가지, 관계의 평정화에 앞서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핵무기 자체의 의미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북관계, ‘우리민족끼리’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번 근본으로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제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국제조약이니까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넘어, 조약에 가입했던 북 정부는 탈퇴를 선언한 바 있지만, 조약안이 발의되게 한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조약 성사에는 여러 국제정치의 전략들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하겠지만, 그 발의에 근본이 된 것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었다. 1955년에 발표된 이 선언은 2차 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파괴력과 살상력을 알게 된 버트런드 러셀이 착안하고 아인슈타인과 다른 유명 지식인과 과학자 13명이 서명한 선언서이다.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것은 타계 수일 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다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퍼그워쉬회의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 선언은 대량살상무기로서의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을 보고 그것은 단순한 전쟁의 수단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도구라고 규정한다. “우리 모두를 죽게 하고 인간을 소멸하게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제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의 전쟁을 폐기해야한다는 제안도 들어 있다. 원자탄개발계획에 참여했다가 탈퇴한 물리학자 조셉 로트블라트가 1995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한 말도, 핵폭탄은 인류를 소멸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원폭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사망자는 13만에서 22만명에 이르고, 원폭의 효과로 인해 몇 달 후의 사망자는 또 9만에서 1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예를 들면 폭탄의 현장에 있지 아니 하였으면서도 방사선의 영향과 화상과 기타 상처로 하여 생긴 희생자들이다. 입이 찢어져서 식사가 어렵게 된 사람이나 다른 고통들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 그중에도 현장에 있었던  소설가 오타 요코(大田洋子)의 『송장의 길거리·屍の街』와 같은 서술에서 실감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 총체에 직결된 핵폭탄의 사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남북 또는 국제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매체를 통하여 남쪽을 ‘불바다’를 만들겠다는 북의 위협은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동아대의 강동완 교수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북에서는 “…수소탄 꽝 꽈르르…/미국놈들 몽땅 타 죽고” 또는 “꽈릉 꽈릉 불벼락에…/청와대의 삽살개 불고기가 될 걸 뭐”하는 것과 같은 말들이 동시(童詩)에까지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고 한다. 아동교육에서까지 과장된 수사가 인간적 사실에 대한 공감을 대신하는 것이다.  
 
조금 맞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정치와 정치적 전략의 관계에 대한, 막스 베버의 관찰과 요청을 살펴보는 것으로써 글을 마감할까 한다. 정치의 전략은 삶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그리고 도덕적 이해를 떠나는 것일 수 있다. 위에 든 예들도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베버는 정치다운 정치는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이해를 철저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에 관한 막스 베버의 유명한 말로 “악마와의 협약”이란 말이 있다. 그 협약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의 일에서는, 어떤 목적을 위한 일이든지 간에, 목적에는 실현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 실현의 수단은 종종 강제나 힘 그리고 폭력을 포함한다. 또는 적어도 그 참뜻을 숨겨 가진 술책, 전략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간계(奸計)라고 부를 수도 있는 수단이 끼어들 수 있다. 또 정치에는 물론 권력을 권력 자체로 추구하는 권력 의지가 작용할 수 있도,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심리에 쌓이게 되는 시기심과 적대 의식과 증오를 동원하고 격발하게 하는 면이 있고, 정치의 목적은 일정한 명령 체계를 통하여 수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하나, 관료 체계의 이익관계가 거기에 밀반입된다. (베버가 정치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현대적 전면전쟁 까지를 포함하여 생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정치가 반드시 악마의 놀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 자체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거나 적어도 집단의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이 정당성은 궁극적으로는 윤리 도덕의 정당성을 말한다. 그것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다시 인간 존재와 생명의 존엄함에 보편적으로 또 공정하게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인간 사회에서, 정치는 이러한 목적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는 인간 행위이다. 다만 목적의 실천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 지향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바른 정치의 경우, 거기에 적용되는 윤리가 있다. 이것을 베버는 “책임윤리”라고 부른다. 그것은 행동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도덕적 윤리적 목적을 한결같이 지향하는 “소신의 윤리”에 대조된다. 책임윤리의 정치는, 그 수단에 있어서 윤리를 잠시 유보할 수 있으나,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치이다. 그것은 결과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정치 행위 전체에 대하여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정치를 말한다.
  
베버,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는 정치 강조  
 
책임 윤리도 소신 윤리에서 볼 수 있는 바, 단호한 결심을 요구한다. (베버는 이것을 “나는 달리 할 수가 없다”는 처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연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결심을 결연하게 선언한 말인데, 베버가 이 말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은, 책임 윤리의 정치에도 이러한 도덕적 결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이었다.)
 
베버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인간적인 정치에서는 책임의 윤리와 절대적 윤리 가치의 윤리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성숙한” 정치인은 정치의 현실적 결과를 고려하면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여기에서의 윤리란 인간 존재와 생명에 대한 존중을 근본으로 하는 삶의 태도이다. 러셀-아인슈타인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인간 생명의 존중이다.
 
이러한 사람의 삶의 깊은 의미, 거기에서 나오는 보편적 윤리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것이 오늘의 우리 정치 실태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차원이 사라진 것은, 정치가 어떤 상태이든지 간에, 우리의 사회가 삶의 심각성에서 풀려난 그리하여 낙관할 수도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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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