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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문학] 잔인한 문장들

강경석 문학평론가

강경석 문학평론가

『레몬』은 권여선의 네 번째 장편소설로 원고지 400매 남짓의 비교적 짧은 분량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분류로는 중편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안에 든 이야기의 내용적 규모는 그의 장편 전작(前作)들인 『푸르른 틈새』(1996)나 『레가토』(2012) 못지않다. 17년에 걸친 시공간 범위도 그렇거니와 한 여고생의 죽음에 얽혀든 등장인물들의 유전이 제법 자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레몬』은 중편의 외형에 ‘장편 서사’를 압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의 밀도가 높고 장면마다에 배인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긴장이 고르게 팽팽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많은 삽화나 자세한 정황 서술이 끼어들 틈 없이 풍부한 암시의 대사와 요점적이고도 극적인 정황 제시를 통해 유지되는 속도감 또한 작품의 흡인력을 배가하는 요소다.
 
권여선 『레몬』(2019).

권여선 『레몬』(2019).

한편 작가가 선택한 다중시점도 이러한 압축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데 한몫한다. 이만한 분량의 작품에서 여러 화자를 교대로 내세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읽는 흐름을 끊고 공연히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매 장마다 일인칭 화자가 바뀐다. 하나의 사건을 탐색하되 여러 개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사건의 진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혹은 끝내 완전히는 밝혀지지 않을 비밀이 남아있다는 암시이고 바로 그 ‘진실의 결여’가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예고이다. 물론 끝까지 읽고 나면 김해언이라는 한 여고생의 갑작스런 죽음을 둘러싼 상당수 의혹들이 풀리지만 끝내 죽음의 직접적 계기나 인과가 투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왜 진실은 끝내 결여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이 작품의 진정한 초점이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사건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건 이후 살아남은 연루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의 무거운 질문이 반복된다. 도대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죽은 해언의 동생 다언은 작품의 초반부터 이미 단언한다. “그(유력 용의자로 의심받던 한만우:필자)의 삶의 갈피갈피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겠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12면)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문장이 작가의 주제의식을 직접 운반하는 경우도 적진 않지만 『레몬』이 그런 소설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되며 의미심장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려는 작품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훨씬 더 길어졌을지도 모를 이 작품에 군더더기라고 할 게 하나도 없듯이 삶이라는 말과 관념에 들러붙은 이런저런 전제와 정답과 단정들을 걷어내는 힘겨운 ‘노동’을 작품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얼마나 마주하기 두려운 것이든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작가의 말’) 인간 삶의 저 캄캄한 갱도 밑바닥까지 자맥질해 들어가는 것만이 마치 작가의 유일무이한 윤리라는 듯이 말이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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