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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농민과 함께 50년…동네 사람들이 곧 예수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올해 50돌을 맞은 가톨릭 안동교구청을 23일 찾았다. 거기서 ‘가톨릭 농민사목의 대부’이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한 두봉 주교를 만났다. 아흔 살의 나이에도 두봉 주교는 계단을 거뜬히 오르고, 지금도 텃밭에서 몸소 농사를 짓는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세월은 무려 65년, 안동교구장만 만 21년 역임했다. 유림의 고장 안동에서 가톨릭 사목으로 일생을 바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안동교구 초대교구장인 두봉 주교가 현 교구장인 권혁주 주교의 손을 맞잡고 있다. 두봉 주교가 교구장일 때 권 주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당시 두봉 주교가 직접 축복해 주었다.

안동교구 초대교구장인 두봉 주교가 현 교구장인 권혁주 주교의 손을 맞잡고 있다. 두봉 주교가 교구장일 때 권 주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당시 두봉 주교가 직접 축복해 주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게 언제였나.=
“1954년이었다. 한국전쟁 이듬해였다. 당시 한국은 황폐했다. 전쟁으로 건물이 다 무너진 상태였다. 서울도 폐허뿐이었다.”
 
왜 한국을 택했나.  =
“한국전쟁 때 나는 프랑스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신학교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국전쟁 지원군을 모집했다. 나도 지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학생 신분이라 포기했다. 대신 내 친구가 지원했다. 고아였던 그 친구는 결국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두봉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에게 ‘한국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심정이 어땠나.  =
“한국전쟁 때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때 성직자도 반 이상 죽었다. 교황청에서 한국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겼다. 나는 기뻤다. 당시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였다. 모든 게 파괴됐다.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 점이 오히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곳에서 내 삶을 바치고 싶었다.”
 
두봉 주교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을 하며 내 삶을 바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봉 주교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을 하며 내 삶을 바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와서 12년간 대전교구에서 일한 그는 1969년 주교품을 받고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안동은 유림의 고장이다. 한국 사람이 주교를 맡아야 한다”며 네 차례나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동의 유림이 보수적이진 않았나. =
“그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공자 이야기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유림이 보수적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막상 만나보니 달랐다. 그분들은 정직했다. 양심을 따라서 사는 분들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분들과 마음이 통했다. 안동에서 ‘오원춘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분들은 손뼉을 치며 지지해 주었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오원춘 사건’이 터졌다. 정부 지침대로 감자를 심었는데 비가 오지 않아 썩은 감자가 많이 생겼다. 안동의 농민이자 가톨릭 신자인 오원춘씨가 정부에 항의해 보상을 받아냈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그를 납치해 고문까지 했다.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하던 두봉 주교는 농민의 인권을 문제 삼으며 정부에 저항했다. 결국 강제 추방 명령까지 받았다.  
 
강제 추방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했나.  =
“당시 바티칸 교황청에서 나를 불렀다. 일종의 조사를 받았다. 교황청에서는 ‘안동 교구장 사표를 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사표를 내긴 했지만, 그 일로 사표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절대 못 하겠다’고 했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그만두면 어떡하느냐고 항변했다. 나는 ‘교황님께서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두봉 주교가 구청 앞에 세워진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는 '기쁘게, 떳떳하게'라는 제목과 함께 자신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두봉 주교가 구청 앞에 세워진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는 '기쁘게, 떳떳하게'라는 제목과 함께 자신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주교회의 의장인 윤공희 대주교를 교황청으로 불렀다. “그분들과 함께 셋이서 교황님께 한국의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교황께선 ‘만약 두봉 주교를 추방하면 안동 교구장 후임을 임명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겠다’며 지지해 주셨다.” 그렇게 두봉 주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두봉 주교의 사목은 교구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었다. 46년 전에 그가 내린 결정은 지금 돌이켜봐도 파격적이었다.  
 
1973년이었다. 안동에는 마땅한 문화공간이 없었다. 새 성당을 짓는데, 나는 ‘안동문화회관’을 짓자고 했다. 가톨릭 내부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조용히 미사를 볼 수 있는 온전한 성당을 짓자고 했다. 그래도 밀고 나갔다. 안동에서 가장 높은 6층짜리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도 그 건물에 처음 생겼다. 그 건물의 작은 일부 공간만 성당으로 썼다. 나머지는 모두 안동의 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신자들은 싫어하고, 비신자들은 좋아했다. 교회 따로, 사회 따로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후 두봉 주교는 국내 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대를 안동에 세웠다. 1982년에는 프랑스 나폴레옹 훈장을 받았다. 이달에는 국내에서 대통령 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을 받았다.  
 
두봉 주교가 안동교구청 앞에서 "기쁘게,떳떳하게"라며 자신의 사목표어를 외치고 있다. 농민운동을 지도한 그의 표정은 투사보다는 해맑고 순진한 어린아이에 훨씬 더 가까웠다.

두봉 주교가 안동교구청 앞에서 "기쁘게,떳떳하게"라며 자신의 사목표어를 외치고 있다. 농민운동을 지도한 그의 표정은 투사보다는 해맑고 순진한 어린아이에 훨씬 더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두봉 주교는 가슴에 담고 있는 말씀을 꺼냈다. “오늘 아침 동네 사람들과 미사를 올릴 때도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겠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고 하셨다. 그게 참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는 그런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 그걸 알면 삶이 참 감사하다.” 그건 두봉 주교가 일생을 바쳐 농민 사목을 가능케 한 힘이자 뿌리였다.    
 
안동=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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