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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윤경숙의 ‘미세먼지 식사’ 대접

전영기 중앙일보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칼럼니스트

“공기는 만인 앞에 평등하다. 물은 가려서 마실 수 있지만 숨은 가려서 쉴 수 없다. 우리는 호흡 공동체, 생명 공동체. 한쪽에서 병이 나면 다른 쪽도 아프다. 침묵의 살인자에 맞서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를 맞이할 국민행동에 나서자. 여기 미세먼지와 맞서는 세계 최초의 국민체험 행사가 있다.”
 

광화문 광장 최초 야외 레스토랑
중증 호흡기 질환 셰프가 던지는
“공기는 만인 앞에 평등” 메시지

나는 5월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뒤편에 임시로 차려진 옥외 레스토랑에서 수만원 값어치는 되어 보이는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퇴근길 회사원들을 포함해 300명 가까운 시민들이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수십 개 원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었다. 부산, 광주, 대구, 순천에서 올라온 초청객들도 있었다. 앞머리의 따온 글은 이 행사가 시작될 때 상영된 동영상 창작품 ‘미세먼지와 싸우는 시민의 용기’에 나왔던 글귀다. 미세먼지 가득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수백명 시민이 두 시간 동안 집단으로 밥을 먹는 행위는 비장미 풍기는 일종의 전위예술이었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놓인 산소캔을 밥 먹는 중간중간 흡입했고 방독면을 쓴 색소폰 연주 등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이색 퍼포먼스들이 이어졌다.
 
이 특별한 행사의 이름은 ‘광화문 레스토랑-미세먼지 속의 다이닝’이다. 손님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훔친 주인공도 탄생했다. 집단 행동예술의 무대감독이자 300명분의 아름답고 충실하고 맛있는 음식을 실제로 지어낸 윤경숙(53) 셰프다. 그는 만성폐쇄성 호흡기질환자(COPD)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숨을 쉴 수 없는 호흡곤란 증세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져 수년간 고독하게 병상을 지켜야 했다. 재활과 재기에 성공한 지금도 윤 셰프는 기도확장기와 산소흡입캔을 휴대하고 다닌다. 무대에 올라서도 불편한 목 부위를 연신 만졌다. 그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오늘 여러분을 대접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년 가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광화문 광장에 하얀 식탁보를 깔고 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오늘 그 기적을 이루었다” “아이들도 열심히 키우고 싶고 일도 열심히 하고 싶다. 미세먼지는 저한테는 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오지랖 넓게 식사를 준비했다. 내년에도 건강하게 숨을 쉬고 있다면 이런 자리를 다시 한번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3분 30초간 윤경숙의 인사말은 자동차 소리와 매연 자욱한 레스토랑의 소란함을 잠재웠다. 윤경숙은 서울 유명 백화점 한식집의 남부럽지 않은 오너 셰프다. 하루하루 요족하게 살만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윤경숙이 미세먼지 속 밥 대접 퍼포먼스를 한 까닭은 누구라도 나서 제 가진 것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에겐 이 땅에서 깨끗한 식재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신앙 같은 본능이 있는데 하늘의 ‘독개스’(그는 미세먼지를 독개스라고 불렀다)가 그걸 해치고 있다고 봤다. 땅의 식재료든 하늘의 공기든 한쪽이 병들면 다른 쪽이 아프다는 게 윤경숙의 생애를 관통하는 체험이다. 광화문 레스토랑에 울려 퍼진 “한국인은 호흡 공동체, 생명 공동체”라는 합창엔 미세먼지와 싸워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시민 행동가의 호소가 섞여 있다. 그는 자기 사재의 일부를 털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내외 각종 다이닝 쇼를 지휘하면서 갈고 닦은 무대연출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광화문 레스토랑은 윤경숙이라는 몸매 가냘픈 폐질환자가 없었다면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에만 영웅이 등장하는 게 아니다. 엿새 전 광화문 광장에서 나는 어벤져스 이상으로 실감 나는 시민 영웅을 보았다. 이 글은 우리 안에 잠자는 시민적 각성을 일으킨 한 여성 셰프에 대한 오마주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정부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준다는 환상적 풍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시민이 아니라 정부가 영웅 행세를 하는 나라는 위험하다. 시민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한다. 
 
전영기 중앙일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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