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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19세기 한·미의 가교였던 외교관의 호기심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지난 한 달 동안 여러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비핵화, 평화협정, 인권, 동맹 관리 등 주제는 달랐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좌절과 미국 국내 정치의 지속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위해 꼭 필요한 회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힘이 빠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고리타분한 입장을 재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에 산소를 공급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저는 이렇게 슬럼프가 오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봅니다. 최신 정책 보고서를 읽는 대신 역사나 전기, 문학 서적을 찾아봅니다. 정책적 딜레마의 직접적인 해답을 얻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관점과 영감을 얻곤 합니다. 이런 동기로 미국의 19세기 천문학자로 잘 알려진 퍼시벌 로웰에 대해 알아보게 됐습니다. 로웰의 집안은 하버드대학교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또 제가 자란 애리조나주의 로웰 천문대로도 익숙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조선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1883년 조선의 수호통상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외교 비서관 퍼시벌 로웰’이란 미국인이 함께 있습니다. ‘과연 이 젊은 미국 청년은 누구였으며 왜 보스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애리조나로 갔을까’란 의문이 생겼습니다.
 
로웰은 보스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수학으로 학위를 받았지만 출생이 정한 전통적 진로에서 벗어났습니다. 남동생인 애보트는 24년간 하버드대 총장을 역임했고 두 여자 형제들은 보스턴에서 예술가와 활동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퍼시벌은 아시아로 훌쩍 건너가 조선과 일본에서 10년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 쓴 책 중 400쪽짜리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 한국의 스케치』란 책이 있습니다. 조선의 외교 대표단과 미국 여행을 하고 왕실의 초대로 1883~84년 한양에서 시간을 보낸 뒤 쓴 책입니다. 현대 미국 독자에게는 글의 스타일이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지만 1970년대 제가 처음 한국을 경험했던 기억과 유사한 삽화와 서술이 감명 깊었습니다. 로웰은 한국의 날씨와 난방 시스템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한양의 놀라운 자연 경관, 겨울에 반짝 빛이 나는 푸른 하늘, 개울에서 옷을 빨고 있는 여성의 강인함, 경이로운 봄, 남성에게 모자가 갖는 중대한 의미(“남자는 그의 배우자보다 모자에 더 강하게 묶여있다”), 상대적 성과주의에 기반한 과거제도(“시험을 치르는 것이 극히 힘들지만 고귀한 출생의 행운을 가진 자에게는 조금 덜 힘들 수 있다”) 등의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저 역시 충청남도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일할 때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이런 주제를 모두 묘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로웰은 음식이 조선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조선 요리가 어떻게 일본 요리보다 우월한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조선인은 살기 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산다. 이런 삶의 목표는 여행을 떠날 때 가장 두드러진다. 여행길 준비가 끝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길에 오르기 시작하지만 조선인들은 가벼운 식사를 하기 위해 앉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저도 여러번 들었던 것이 생각나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로웰의 서술은 과학적이었다 서정적이기도 하고 좌절에서 감탄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통찰이 빛나다 무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관성 있게 호기심이 넘쳐납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폭넓은 호기심과 수학적이고 서사적인 사고 능력 덕분에 아시아에서 돌아온 후 애리조나로 건너가 천문학에서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 관한 글을 쓸 때처럼 별을 연구할 때도 로웰의 관측은 온전히 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화성에 생명체의 증거인 운하가 있다고 믿었고 그 신념을 대중화했습니다. 행성X에 대한 탐구 역시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궁극적으로 명왕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은 맞습니다. 그의 연구는 우주가 팽창하는 성질을 조기에 발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로웰은 외교관이나 아시아 전문가보다 천문학자로 더 많이 기억됩니다. 19세기 후반 한국에 대한 그의 특이한 묘사는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오늘날 한국이나 한·미 관계를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이전의 한·미 관계에 깊은 역사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고 경험하고 이해하려 했던 그의 확고한 의욕과 호기심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19세기 독자층에 만연했던 한국·중국·일본 등 극동아시아에 대한 인상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분 좋은 동시에 절망적으로 이상하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이 같은 비이성적인 이상함에 놓여있다. 우리는 눈은 뜨고 있지만 머리를 닫고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 관심은 실제로 막 잠에서 깨어났다. 그 생명력과 힘은 이제 곧 나타날 것이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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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