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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여자팀, 내가 맞춰준 축구화 신고 월드컵 우승했죠

[스포츠 오디세이] 수제 축구화 장인 김봉학씨
1925년 일제가 만든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2007년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다. 동대문운동장과 야구장을 둘러싸고 있던 스포츠 용품 도·소매상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도 있다. 그중 하나가 축구화 제조·수선 전문업체인 신창스포츠다.
 
1988년 신창스포츠를 차려 31년째 꾸려오고 있는 김봉학(58) 대표는 우리나라에 마지막 남은 수제(手製) 축구화 제조 장인(匠人)이다. 손으로 맞춤형 축구화를 만드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다. 10평(33㎡) 남짓한 공장 겸 사무실에서 오늘도 뚝딱뚝딱 축구화를 만들고 있는 김 대표를 만났다.
 
국내에 마지막 남은 수제 축구화 장인 김봉학 대표가 축구화 제작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국내에 마지막 남은 수제 축구화 장인 김봉학 대표가 축구화 제작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경기도 광주에서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대구에 가서 운동화 제조 공장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월급 한 푼 못 받고 축구화와 육상화 밑창 만드는 일부터 배워나갔다. 처음엔 축구화를 만들기보다는 수선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축구화 제조 기술을 익혔고, 부친 김용산씨의 이름을 따 뫼 산(山)자 모양의 디자인으로 축구화를 생산한 게 1993년이다. 김 대표가 만든 축구화를 신고 뛰는 대한민국 프로 선수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2008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우승한 북한 여자축구팀은 김봉학 축구화를 신었다.
 
하루 3켤레 만들어 17만~18만원에 팔아
 
40년 넘게 축구화만 만드셨는데 돈은 좀 버셨어요?
“지금 이 공장이 다죠. 1980년대 초반까지는 돈 좀 벌어서 누나한테 70평대 아파트도 사 주고 그랬는데 그걸로 끝이었어요. 80년대 중반 나이키·아디다스 같은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수제 축구화는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대량 생산으로 찍어내는데 가격에서 수제가 당할 수가 없죠. 또 사람들이 메이커 축구화 아니면 안 신는 겁니다. 그때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했어요. 스케이트가 뜬다 하면 스케이트화 만들어 팔고, 지방에 일거리가 있다 하면 두세 달 일하다 오는 식이었죠.”
 
메이커 축구화와 신창축구화는 제조 공정이 많이 다릅니까.
“과정은 거의 비슷합니다. 디자인이 나오면 거기 맞춰 가죽을 자르고, 자른 가죽을 재봉틀로 연결하고, 밑창을 대 완제품을 만들죠. 재단-풀칠-미싱-자수-박음질 등을 저는 혼자서 하는 거고 메이커는 모든 작업이 기계화·분업화돼 있습니다. 하루 종일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이 있으니 시간당 생산량에서 상대가 안 되죠. 대신 저는 고객이 원하는 모양이나 디자인대로 ‘맞춤 축구화’를 만들어 줍니다.”
 
여기는 주로 어떤 분들이 찾습니까.
“발에 맞는 편한 축구화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죠. 축구 동호회도 있고, 학교 축구부 선수들도 있어요. 발등이 아주 넓거나 발가락이 유난히 긴 사람, 선천적인 기형이나 사고로 발 모양이 변형된 분들도 많이 찾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저한테 신발을 맞춰 연세대에 진학한 럭비 선수도 있어요. 그 친구는 한쪽 다리가 선천적으로 짧아 한쪽 밑창이 다른 쪽보다 2.5cm 정도 높아야 하거든요. 세상 어디에도 그렇게 신발을 맞춰주는 경우는 없잖아요. 저는 발 모양 본을 떠서 가져오면 거기 맞춰서 신발을 만들어 줍니다.”
 
유명한 선수가 신창축구화를 신은 적이 있나요.
“70∼80년대 꺽다리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던 김재한 선수가 제 단골이었습니다. 2017년 차범근축구상 대상을 받은 15세 이하 대표팀 전유상(14·세일중) 선수도 제 축구화만 신었습니다. 그 선수가 박지성 같은 평발이었거든요. 국가대표 수비수로 뛴 이슬찬(26·전남 드래곤즈)도 고교 때까지는 신창축구화를 신다가 프로 가서는 미즈노로 바꿨더라고요.”
 
프로에서는 신창축구화를 못 신습니까.
“얼마 전까지 프로 팀은 후원 계약한 메이커 축구화만 신어야 했어요. 선수가 다른 메이커 신발을 신으려면 로고를 지우는 ‘블랙 아웃’을 해야 했지요. 지금은 선수 대부분이 브랜드와 개별 계약을 해서 축구화를 공급받습니다. 저야 공짜로 축구화를 신길 수는 없는 처지죠. 발에 잘 안 맞아도 어쩔 수 없이 계약한 브랜드 축구화를 신는 프로 선수도 많습니다.”
 
김 대표가 개발한 프리킥 전용 축구화. [신인섭 기자]

김 대표가 개발한 프리킥 전용 축구화. [신인섭 기자]

프리킥 전용 축구화도 만들었죠.
“지금도 만들고 있고 그것만 신는 선수도 있어요. ‘터치감이 좋다’ ‘공이 발에 착 감긴다’는 반응이 나와요. 글로벌 브랜드 A사에서 축구화에 고무를 부착한 적이 있어요. 스핀은 잘 먹는데 조금만 잘못 차면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제조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저는 원단을 다르게 쓰거나 원단에 돌기나 빗살무늬를 부착합니다. 그러면 신발이 좀 무거워지고 공이 발에 착 달라붙기 때문에 힘이 약한 사람은 공이 덜 나갑니다. 대신 발목 힘이 좋은 선수가 차면 공 회전수가 높아지니까 많이 휘고 힘있게 날아가지요. 프리킥이나 페널티킥을 전담하는 선수는 이 축구화를 선호합니다.”
 
하루에 몇 켤레 정도 만듭니까.
“한 켤레 만드는 데 평균 4시간 정도 걸리니까 하루에 많아야 세 켤레 만들고, 하루 종일 한 켤레만 붙잡고 있는 날도 있어요. 축구화 뒤쪽에 자신의 영문 이니셜을 새겨 달라, 태극문양을 붙여 달라는 등 요구사항을 다 들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켤레당 17∼18만원에 팔죠.”
 
김봉학 대표가 맞춰준 축구화를 신고 2008 FIFA U-17 월드컵에서 우승한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FIFA 홈페이지]

김봉학 대표가 맞춰준 축구화를 신고 2008 FIFA U-17 월드컵에서 우승한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FIFA 홈페이지]

2008년 초 북한 관련 사업을 하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북한 여자 청소년 축구팀이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축구화를 좀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스포츠를 통한 남북 화합에 관심이 컸던 김 대표는 흔쾌히 수락하고 선수당 두 켤레씩 40켤레를 만들어 보내줬다. 신창축구화를 신고 뛴 북한 선수들은 뉴질랜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했다.
 
 
인터넷서 뜨면 ‘제2의 영주 호미’ 기대
 
북한 4·25 축구단이 신은 김봉학 축구화. [신인섭 기자]

북한 4·25 축구단이 신은 김봉학 축구화. [신인섭 기자]

김 대표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했고 “평양에 축구화 공장을 세울 테니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중에 남북 관계가 얼어붙었고, 계획이 흐지부지됐다.
 
2011년에는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를 통해 또다시 연락이 왔다. 송영길 당시 인천시장이 ‘축구화 제조 기술 전수 프로그램’을 재가동했다. 남북이 여전히 냉각 상태라 동대문에 있는 기계를 중국 단둥으로 옮겨 북한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그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면서 또다시 프로그램이 중단됐다.
 
북한 관련해선 아쉬움이 많겠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 참 좋겠다 싶었어요. 한 가지 가르치면 완벽하게 할 때까지 밤을 새서라도 반복 연습합니다. 옛날 우리가 일 배울 때 월급도 못 받으면서 밤 12시, 1시까지 복습하던 것과 같아요. 여자들도 미싱 작업 하는 손이 정말 빨라요.”
 
북한은 지금도 축구화를 못 만드나요.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처음엔 우리 기술과 자본, 북한의 노동력을 합쳐 축구화를 만든 뒤 수출하려고 했거든요. 지금 북한에서 축구화를 만든다고 해도 브랜드 가치가 별로 없기 때문에 경쟁이 어렵죠. 사실 신창축구화도 편하고 기능성이 좋지만 디자인 면에서는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거든요.”
 
김 대표는 올해 58세다. 지병인 신장병 때문에 하루 네 번 신장 투석기에 약을 넣어야 한다. 하지만 투석기를 복대로 감고 축구 경기를 뛸 정도로 체력이 좋고 아직 안경을 쓰지 않고 일한다. 앞으로 10년 이상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가업을 이어주기를 바랐던 아들 성곤군은 두 차례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 병상에 있다.
 
김봉학 대표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축구화를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어준다. 장애나 사고로 자신만의 특수한 축구화를 원하는 지구촌 축구인에게 김봉학 축구화는 복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창스포츠는 1인 기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케팅이나 홍보를 할 여유도 없고, 인터넷에 주문이 올라와도 댓글 달 줄도 모른다.
 
최근 ‘영주 호미’가 아마존닷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경북 영주의 농기구 장인이 만든, 작고 보잘것없는 호미가 ‘농사일에 정말 편하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김봉학 축구화’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제2의 영주 호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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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