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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귀양 갔던 이준경 '복수의 칼' 쓰지 않은 까닭

기자
김준태 사진 김준태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9)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준경(1499~1572)의 시문집, '동고유고' [사진 디지털청주문화대전]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준경(1499~1572)의 시문집, '동고유고' [사진 디지털청주문화대전]

 
1504년(연산군 10년)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한 살 많은 형과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그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던 인물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연산군에 의해 할아버지가 사사 당하고 아버지 이수정과 아버지의 형제 4명이 참형을 당했으며 친인척들이 대거 몰살당하는 등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난 뒤였다. 다행히 2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났지만 1519년, 이번에는 존경하는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목숨을 잃는다.
 
수난의 연속이었던 벼슬살이
그 때문이었을까. 이 어린아이가 성장해 청년이 되었지만 칩거하며 독서에 전념할 뿐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들이 죽거나 탄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직 생활에 회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갔는데 당시로써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여전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 명종과 선조 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이야기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시련도 모자라 이준경의 벼슬살이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조정에 출사한 직후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이 무죄라고 주장했다가 권력을 장악한 척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 것이다. 그러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고 이후 5년 동안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벼슬살이한 것은 척신정치를 자행하던 김안로가 몰락한 1537년부터로 이조좌랑, 홍문관 부제학, 형조참판, 대제학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이준경의 스승은 정암 조광조다. 벌레가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를 따라 나뭇잎을 갉아먹어 누명을 쓴 일화가 유명하다. 사진은 조광조 유배지의 모습. [중앙포토]

이준경의 스승은 정암 조광조다. 벌레가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를 따라 나뭇잎을 갉아먹어 누명을 쓴 일화가 유명하다. 사진은 조광조 유배지의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준경의 시련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아끼는 제자이자 조카인 이중열이 사약을 받았고 우애가 깊던 사촌 형제들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때 슬픔을 이기지 못한 이준경이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경 자신도 외척 윤원형의 일파인 이기, 진복창 등의 모함으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원래는 사형이 내려질 수도 있었던 위기였지만, 중전의 조부이자 명망 있던 재상 심연원이 필사적으로 변호해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보통 이와 같은 경험을 거듭해 겪으면 마음속에 분노가 쌓인다. 자신에게 시련을 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갚겠다는 것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응징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이들과의 전면전을 사양하지 않는다.
 
이준경의 묘. 한이 많았을 텐데도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중용의 길을 택했다.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준경의 묘. 한이 많았을 텐데도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중용의 길을 택했다.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털]

 
물론 부정부패한 무리를 축출하고 불의(不義)한 집단의 과오를 드러내 그 책임을 묻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나라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공동체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문제는 분노의 감정만 앞서다 보면 일을 그르치게 되기 쉽다는 점이다. 섣부르게 개혁을 추진하며 기득권 세력과 대결하다가 좌절하고, 그로 인해 오히려 퇴행하게 된 사례는 역사 속에서 낯설지 않다.
 
척신세력 제거에 제동
이준경이 영의정으로 재임했던 선조 즉위 초기는 전횡을 휘두르던 척신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집권한 시기다. 사림의 급진파들은 당장에라도 척신세력의 잔당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준경은 이와 같은 움직임에 제동을 건다. 강한 비난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이준경이 기득권 세력을 방치한 것은 아니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구세력의 힘을 약화하고 별다른 소란 없이 이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준경은 그 누구보다도 척신세력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사람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4대 사화(士禍) 중 3대 사화에 직접 연관되며 큰 피해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척신세력을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만으로는 일을 풀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인의 원한은 뒤로 미룬 채 무엇이 가장 나라를 위한 최선인지, 중용의 길을 걸은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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