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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먹잇감이 된 사회적 대화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때로 드라마만큼 현실을 잘 투영한 게 없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새삼 3년 전 인기를 끈 ‘태양의 후예’의 한 장면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북한 측 대표가 청와대 인사에게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합의를 위해 공화국이 요구하는 선결 조건이요”라며 문서를 던진다. “성의를 이미 표했다”는 우리 측 반박에 “남조선에서는 대화하는 것 좋아하지 않슴메? 계속해서 대화하자는 것 아이요. 문서에 적힌 요구조건 해결되기 전에 합의는 없소”라고 잘라 말한다. 청와대 수석은 “여기 써 있는 조건들이란 게 이산가족 상봉이고, 나발이고, 뭔 상관이냐. 남북대화 때려치자~ 이렇게 써 있는 것 같은데”라고 받는다. 그러자 북한 측 대표는 껄껄 웃으며 “북남 간에 대화가 좋은 점이 통역이 필요 없는 것 아이갔소? 기럼, 답은 들은 걸로 알고 먼저 일어나갔슴메다”라고 말한다.
 
시간을 끌며 논점을 흐리고, 이득 될 걸 얻고는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먹튀’다. 대화 상대는 물론 대화 자체도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경우로 한정한다. 남북관계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드라마 대사를 사회적 대화로 치환해봤다.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의 지금 상황과 꼭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경사노위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성적은 초라하다. 의결된 합의문 하나 없다. 민주노총은 참여를 거부했다. 최종 의결 권한을 가진 계층별 위원 중 근로자 위원 3명은 본회의에 안 나타난 지 오래다. 여성·청년·비정규직을 대표한다며 대통령이 위촉한 인사들이다. “민주노총과 보조를 맞추는 경향이 강한”(고용노동부 관계자) 이들이 합의해주지 않으면 경사노위 차원의 합의는 어렵다.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구성원 입장에선 세 사람 때문에 될 것도 안 되는 반면, 그들에겐 안 될 게 없는 희한한 상황이다. 본회의에 참석하려던 대통령의 일정까지 무산시켰으니 그 힘이 대단할 따름이다. 오죽하면 한국노총이 “경사노위를 재구성하라”고 요구했겠는가. 그것도 노동절에 그랬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도 “주고받을 준비와 용기가 없으면 사회적 대화에 들어와선 안 된다”며 “내 생각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하는 분들은 경사노위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다.
 
이쯤 되면 세 사람은 사퇴하는 게 상식인데, 그럴 조짐은 안 보인다. 한 노동계 인사는 “얻고자 하는 게 있어서지. 훼방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불출석을 통한 의결 정족수 미달로 합의를 무산시키는, 법으로 보장된 훼방 기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노총의 경사노위 재구성 요구는 관련자를 해촉하고 새로 위촉하라는 압박으로 보인다. 해촉 관련 규정도 없으니 위촉자인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게 경사노위 안팎의 해석이다. 안 굴러가는 시스템을 고치지도 않고 잘 굴러가길 바라는 건 직무유기다.
 
한데 경사노위는 얼마 전 노사정 대표 중심으로 꾸려가기로 밀약을 했다. 굳이 계층별 위원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뒤집어 해석하면 사회적 합의를 아예 접은 셈이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가 몇 명 때문에 존재의 가치마저 은근슬쩍 팽개치고, 편법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찜찜하다.
 
경제와 고용노동정책에 대한 지지가 60% 안팎에서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반등하려면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는 건 정부·여당도 안다. 노동개혁은 사회적 대화라는 양탄자를 밟아야 가능하다. 그러려면 걸림돌을 과감히 치우는 결단도 필요하지 않을까. 참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적 대화를 일각의 먹잇감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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