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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재인 정부, 한·일관계 망치면 이명박 탓 할건가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한·일관계 파탄의 첫 위기가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새로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에게 축전을 보내고, 퇴위한 아키히토 일왕에게도 사의(謝意)를 담은 서한을 보냈다. 1998년 김대중정부 이래의 관례대로 ‘일왕’이 아닌 ‘천황’으로 명기해 예우했다. 31년간의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마감하고 레이와(令和) 시대를 맞은 일본을 무시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방국의 신구(新舊) 국왕에게 축전과 서한을 보내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다. 그런데 쉽게 나온 결정이 아니었다. 외교부 건의를 받은 청와대는 가부(可否)의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위안부 합의 이행과 징용공 배상판결 등 과거사 문제로 최악의 국면을 맞은 한·일 관계의 복합다중골절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 더불어민주당의 4선 중진인 김진표 의원이 나섰다. 노영민 비서실장, 정의용 안보실장, 강기정 정무수석을 설득해 대통령의 결심을 끌어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배상판결로 힘을 얻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레이와 시대가 열린 첫날인 5월 1일 일본 전범기업 국내 자산의 현금화 절차에 착수했다. 일본은 이미 현금화에 대한 전방위적인 보복을 예고한 상태였다. 이 판에 한국 대통령이 일본 국민에게 절대적 존재인 일왕에게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본은 잔칫날 모욕을 준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축전과 서한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도 사전에 전달됐다. 김 의원은 다른 중진의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아베의 최측근 실세그룹 의원들과 양국관계 회복을 위한 논의를 할 예정이다.
 
김 의원은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지냈고, 노무현·문재인 두 대통령 정권 인수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민주당 주류인 친노·친문이나 586운동권과는 결이 다르다. 보수적 시각이 당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고 공격받았고, 대표선거에서도 패배했다. 그러나 뚝심을 발휘해 문 정부에 부족한 현실감각과 경제, 외교안보의 실질적 해법을 제시해 왔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일본은 한국정부가 지난해 10월 대법원 징용공 배상판결 이후의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1965년 한일협정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6월 28일 오사카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려면 우리 정부가 징용공 문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이 나온 뒤 원로 전문가들을 불러 의견을 청취했던 이낙연 국무총리도 6개월째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베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 지금의 평화헌법을 고치려고 한다. 우리가 두 손 놓고 있으면 역사수정주의와 개헌이라는 우경화의 깃발을 든 아베는 한·일 갈등을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을 외면할 것이다.
 
양국관계는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경제인 교류는 끊겼고, 한국소비재 상품의 일본 내 판매는 직격탄을 맞았다. LS전선 명노현 사장은 “한국 기업들은 원천기술을 가진 일본과 협력하고 있다”며 “우리와 20년 가까이 거래해온 일본의 첨단 소재회사 간부가 ‘단가를 내려주고 싶은데 한·일 관계가 안 좋아 젊은 부하들이 안 움직인다’고 하소연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안보에도 직격탄이 날아올 것이다. 일본엔 유엔사 관할 7개 기지가 있다. 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미국 본토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투입된다. 장비의 투입과 보급도 일본에서 이뤄진다. 한·일 양국은 미국을 가운데에 둔 실질적인 동맹이다. 그런 일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일본 지식인들이 애독하는 문예춘추 4월호는 ‘일·한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북핵에 맞서 뭉쳐야 할 한·미·일 동맹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일본과 다시 잘 지내려면 아베에게 영향력이 있는 트럼프와 친해져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미국과의 채널이 막혀 있고, 아베는 트럼프와 막역하다. 트럼프는 아베를 통해 한·일 관계를 판단하고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조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현장의 숨소리까지 다 미국에 알려줘라”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혜가 아쉽다.
 
과거사가 한·일 간 경제와 안보의 협력 토대를 집어삼키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는 없다. 일본에도 손해지만 우리는 치명상을 입는다. 징용공 문제는 낙타의 등을 부러뜨릴 마지막 지푸라기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일왕 사죄 발언이 한·일 관계 악화를 촉발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정부가 6개월간 방치해 온 건 무책임하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의 대통령위원회 구성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바란다. 위 대사는 “각 정파가 추천하는 순수 민간인 10여명이 해법을 내고 중지를 모으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이 분산된다”고 했다.
 
일단 파국으로 향하는 열차를 중단시키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급한 불을 끄려면 이념의 깃발을 내려놓고 리얼리스트의 간절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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