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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 장그래 실사판?...바둑 연구생에서 지금은 보드게임 개발하는 이 남자

몇 년 전 드라마로 제작돼 인기를 누린 웹툰 '미생(未生)'.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두 집이 나지 않아 생사가 불분명한 돌을 뜻하는 바둑용어 '미생'에서 제목을 딴 이 작품에는 프로바둑 기사를 꿈꾸다 좌절을 겪은 후 어렵게 회사에 들어가 정직원에 도전하는 '장그래(임시완 분)'가 등장한다. 모든 일에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고 '완생(完生)'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은 힘든 청춘을 위로하고, 고달픈 직장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보드게임 등을 만드는 한올엠앤씨(M&C)에는 미생 속 장그래의 '실사판'이 있다. 프로바둑 기사를 목표로 하던 김정수 게임사업팀 과장(아마 6단·37)이 그 주인공이다. 10살에 바둑을 처음 접하고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입문한 그는 초등학교부터 20대까지 바둑만 뒀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김 과장처럼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다 실패한 뒤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취재해 작품을 만들었다.
 
프로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뒤, 한국물가정보 광고팀을 거쳐 한올M&C에서 보드게임(판 위에서 말·카드를 놓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게임) 개발업무를 하고 있는 김정수 과장을 지난 2일 경기도 파주 사옥에서 만났다. 하루에 최소 3판, 1년에 1000판씩 대국을 했다는 그는 바둑 경험이 게임개발에 힘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바둑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김정수 씨(아마 6단)가 2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한국물가정보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바둑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김정수 씨(아마 6단)가 2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한국물가정보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어떻게 바둑에 입문했나.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 멋모르고 바둑 교실에 간 게 결정적이었다. 친구는 막상 한 달 만에 그만뒀지만 저는 재밌어서 계속했다. 더 잘하고 싶어 고향인 경남 창원을 떠나 중1 때 홀로 서울에 있는 도장(허장회 도장)에 올라왔다.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입문한 뒤 일과는 타이트했다. 평일엔 새벽 6시에 일어나 운동한 뒤 아침 먹고 오전 9시까지 도장에 갔다. 그때부터 밤 10시까지 바둑만 뒀다. 적어도 하루에 3판은 무조건 뒀다. 주말에는 연구생끼리 시합을 붙였다. 1조부터 6조까지 있었다. 1조가 제일 수준이 높은데 매주 시합을 통해 조가 바뀌었다. 처음에 6조였는데 3개월 만에 2조가 됐고 나중엔 1조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1만~1만5000판은 둔 것 같다. 
 
노력한 끝에 프로바둑 기사가 될 '뻔' 했다.
2001년 연구생입단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서 뽑히면 프로가 되는 관문이었다. 매년 10명이 겨루는데 8연승을 했다. 그리고 8승을 한 또 다른 선수(백홍석 9단·신안천일염 바둑팀)와 결선에서 맞붙었는데 졌다. 원래 매년 연구생 중에서 2명을 뽑았었는데 유독 그 해만 1명을 뽑았다. 9전 8승 1패를 하고도 떨어진 거다.  
 
분하고 속상했겠다.     
프로 문턱서 좌절했지만,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대학도 명지대 바둑학과에 들어갔다. 한 해에 20명 정도 입학한다. 이창호 프로의 아내인 이도윤 씨(전 바둑기자)가 같은 과 후배다. 대학 때도 프로 입단을 포기하지 못해 휴학을 오래 했다. 어릴 때 공부하던 도장에서 '고시생'처럼 두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바둑만 할 수는 없어 5일 중의 2일은 도장에서 사범 역할로 아이들을 봐줬다. 나이가 차면서 프로입단의 꿈을 접고 직장을 찾아야 했다. 
 
첫 직장인 한국물가정보에 입사한 계기가 있나.
한국물가정보(기획재정부 등록 전문가격조사 및 원가계산용역기관)는 바둑 하는 이들에게는 친숙한 곳이다. '한국물가정보 배'라는 프로기전(棋戰·상금을 걸고 승자를 가리는 대회)을 10여년 개최했기 때문에 이름을 많이 들어본 회사였다. 31살에 늦은 졸업을 하면서 한국물가정보 신입 공채로 합격했다. 입사해서 잡지 편집·광고영업 등을 했다. 그러다 게임개발을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고 지금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바둑 경험을 좋게 보신 것 같다. 게임개발은 지난해 3월부터 시작해 올해 2년 차에 접어들었다.
  
보드게임 개발업무에 바둑이 도움되는지.
도움이 된다. 바둑은 보드게임의 한 종류이자 인류가 오랫동안 즐겨온 뛰어난 게임 중 하나다. 간단한 규칙 아래에서 기물(판과 돌)과 같이 둘 수 있는 상대가 있으면 된다. 좋은 게임은 첫째, 쉽게 배울 수 있고 둘째, 계속해도 늘 새로워야 한다. 승부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과정이 재미있어야 한다. 바둑은 늘 새롭다. 본인의 좋은 수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도 그만큼 좋은 수를 생각하니까 게임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래서 오랜 역사에도 지금껏 같은 내용의 바둑은 한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맡았던 게임을 소개한다면.  
저희 팀이 자체 개발한 첫 게임은 올해 2월 출시한 '더 헌트: 그란차코'다. 남미의 ‘그란차코’라는 사냥의 땅에서 각자 다른 특기를 가진 사냥꾼들이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다. 또 올해 4월 독일의 보드게임을 국내에 단독으로 들여왔다. 글룩스(GLUX)라고 하는데 바둑과 유사한 '추상 전략 게임'(2~4인용)이다. '수읽기'가 가미되었는데 바둑보다 쉽다. 추천한다.  
바둑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김정수 씨(아마 6단)가 2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한국물가정보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바둑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김정수 씨(아마 6단)가 2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한국물가정보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본인처럼 '미생'인 연구생들이 많을 것 같다. 
청소년들이 1년에 몇백명씩 배워도 프로가 되는 건 손에 꼽힌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가 평범한 직장인이다. 같이 바둑을 배웠던 친구들은 포스코·CJ 등에 다닌다. IT기업 운영자도 있다. 프로기사는 아니지만, 프랑스·스위스 등에 바둑을 보급하는 프리랜서도 있다. 저희 같은 연구생의 이야기가 드라마 '미생'에 녹아든 것이다. 물론 바둑 관련 커리어를 가진 이도 있다. 개그맨 김학도 씨의 아내 한해원 기사(한국기원 소속)가 동갑내기 친구인데 바둑 해설자를 했다. 바둑 교실이나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알파고-이세돌 대국 이후로 바둑계의 충격이 컸다. 인공지능(AI)과의 대결에서 기사들은 이길 수 있을까.
AI 발전속도가 워낙 빠르다. 과거의 '정답'이던 수가 지금은 정답이 아니게 됐다. 중국 기사 커제(柯潔)의 경우, 과거라면 비난받았을 수를 뒀는데 그게 좋은 수라고 호평받기도 했다. 또 옛날처럼 8시간, 10시간씩 두지 않는다. 그래서 한 수를 결정하는 속도가 빨라진 듯하다. 기사들이 AI와의 대결에서 이기려 하기보다 이를 활용해 바둑 실력을 연마하고 있다. 과거 책을 통했던 걸 이제 AI를 통해 공부하는 셈이다.
  
좋아하는 기사는.
한종진 9단이다. 바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생활한 형이다. 둘 다 고향이 서울이 아니다 보니 제가 결혼 전까지 룸메이트로 같이 산 적도 있다. 지금 도장을 운영 중인데 아이들과 바둑을 사랑하는 마음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한 9단은 일본 최연소 프로 기사 나카무라 스미레를 한국에서 2년간 가르쳤다) 좋아하는 스타일은 유창혁 9단과 이창호 9단이다. 유 9단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중3 때 한 번 대국한 적이 있다. 끝난 뒤에는 꼼꼼히 복기도 해주셨다. 초일류 기사는 차원이 다르다 느꼈다.    
 
좋아하는 바둑 용어는.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진다는 말이다. 1000년 넘게 전해져온 바둑 십계명의 첫 번째 격언이다(이창호 9단의 자서전 명이기도 하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는 9월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동물 캐릭터를 활용한 게임을 출시할 예정이다. 남녀노소 즐길 수 있고 특히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게임에서도 바둑의 '예의'를 반영한 게 좋다. 바둑은 먼저 두는 사람이 유리하다. 그래서 첫수를 두면 상대에게 '덤'(한국은 6집 반)을 준다. 보드게임에도 불리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게 있다. 그런 '페어플레이' 게임이 좋다. 교육업체에 근무하는 아내와 갓 100일이 된 아들이 있다.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싶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아들도 할 수 있는 교육용 온라인 게임 제작에 도전하고 싶다.   
 
글=서유진 기자·사진=김경록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사진제공=tvN]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사진제공=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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