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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봉인 푼 인구 500만 핀란드, 헬스기업 500개 ‘빅뱅’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서북쪽에 자리한 헬싱키의과대학 연구동 제2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핀란드 국민의 유전자 정보 분석을 위한 혈액·조직 샘플 저장소가 나온다. 이곳엔 총 15개의 커다란 저장용기가 있다. 각 용기마다 샘플 14만 개를 보관하고 있다. 핀란드분자의학연구소(FIMM)는 이 샘플을 가지고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고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핀란드 정부가 주도하는 ‘핀젠(FinGen)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티나 베스테리넨 FIMM 연구원은 “샘플은 영하 180도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며 “1명당 6개의 샘플이 필요하므로 이곳에만 약 35만 명의 유전자가 보관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12월, 핀란드 정부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실험을 시작한다”는 말로 2023년까지 핀란드 국민 약 10%에 해당하는 50만 명의 유전자를 수집·분석하겠다는 핀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지난 4월 29일에는 의료·사회 정보의 2차 이용을 허용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핀젠 프로젝트로 축적한 유전자 정보와 그간 핀란드 정부가 쌓아온 국민의 의료·사회 정보는 공공·민간할 것 없이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핀란드 분자의학연구소 티나 베스테리넨 연구원이 냉동보관용기에서 핀란드 국민의 혈액·조직 샘플을 꺼내고 있다. [황정일 기자],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핀란드 분자의학연구소 티나 베스테리넨 연구원이 냉동보관용기에서 핀란드 국민의 혈액·조직 샘플을 꺼내고 있다. [황정일 기자],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인구 500만 명이 조금 넘는 핀란드가 헬스산업을 통해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펴고 있다. 한때 휴대전화 판매 세계 1위 기업 노키아를 키워 내며 경제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노키아가 쇠락하면서 핀란드 경제도 급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후 고령화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헬스산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다시 한 번 도약을 준비 중이다. 핀란드 정부에 따르면 핀란드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졌지만, 헬스산업만큼은 예외다. 지난해 핀란드의 헬스케어 수출액은 22억9300만 유로(약 3조원)로, 전년 대비 4% 안팎 성장했다.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헬스산업이 노키아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현재 핀란드에는 500개 정도의 헬스 관련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바이엘 등 글로벌 제약사나 GE헬스케어 등 세계적 헬스 기업이 핀란드에 R&D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이처럼 핀란드의 헬스산업이 쑥쑥 자라는 건 방대한 의료 데이터와 정부의 지원 덕분이다. 핀란드는 1954년부터 국민 건강상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민의 진료·사회 기록을 수집해왔다. 환자에 대한 기초 자료는 물론 처방전, 치료 계획 등이 망라돼 있다. 이렇게 쌓아 온 진료·사회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칸타 서비스, Kanta Services)화하고, 이를 민간에 연구용으로 제공하고 있다. 곳곳에서 스타트업이 생겨나고, 세계적 기업이 핀란드로 몰려드는 이유다.
 
MRI 영상을 입체화해 골절 등을 진단하는 장비를 개발한 스타트업 디스이오루의 사카이 소이니 최고기술책임자는 “영상의 입체화 기술은 이미 노키아에서 개발했지만 노키아가 쇠락하면서 사장될 뻔 한 기술”이라며 “이 기술이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만나 혁신적인 제품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제품은 현재 중국 등지로 수출을 앞두고 있다. 이 회사처럼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헬싱키대학병원과 손잡고 새로운 의료장비를 장비를 개발 중인 스타트업만 100곳이 넘는다. 여기에 핀젠 프로젝트까지 가시화하면 혁신적인 신약·의료장비 개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핀란드 정부는 기대한다. 국내의 한 제약사 관계자는 “핀란드가 추진하는 핀젠 프로젝트가 가시화하면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을 줄여 개발 기간이나 성공 확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핀란드 정부는 헬스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복용약이나 주사제 입자를 나노 크기로 축소하는 기술을 개발한 스타트업 나노폼은 6년 전 공기업인 비즈니스핀란드의 도움으로 창업 자금과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 회사의 에드워드 헤그스트로 최고경영자는 “비즈니스핀란드가 펀딩을 통해 200만 유로(약 26억원)를 지원해 준 덕에 아이디어를 특허 받은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며 “비즈니스핀란드는 여전히 회사 운영 등에 필요한 것을 조언하거나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격진료 등을 적극 활용하면서 사회적 비용도 아끼고 있다. 헬싱키시는 2014년부터 만성질환 노인 환자 등 1000명에 대해 원격진료를 도입하면서 한 해에만 900만 유로(약 119억원)를 절감했다. 간호사·의사의 환자 가정 방문 비용을 확 줄인 덕분이다. 헬싱키시뿐 아니라 핀란드의 주요 지방자치단체가 원격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빠른 고령화로 사회적 비용이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원격진료 등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시범사업 도입 이후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갖고 있는 의료 정보도 무용지물이다. 헬스산업 업계의 한 관계자는 “노인 복지 차원에서라도 원격진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규제 완화가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기술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헬싱키(핀란드)=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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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