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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미술] 변월룡과 한국미술의 경계 넘기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변월룡, 낯선 듯 익숙한 이름이다. 변월룡(뻰 바를렌 : Пен Варлен, 1916-1990)은 러시아 연해주 출생의 고려인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레핀 미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최초의 고려인 화가다. 뛰어난 초상화가로 주목받던 변월룡은 1953년 7월 평양미술대학에 파견되어, 전후 북한 미술계에 소련식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이식하고 차세대 미술인을 양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학고재)에는 그의 전체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유화, 동판화, 소묘 등 189점이 전시되고 있다.
 
변월룡이 기울였던 헌신적 노력은, 북한 화가들이 그에게 보냈던 50여 통의 편지가 러시아에 유학중이던 문영대(현 미술평론가)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변월룡은 소묘력 향상을 위해 평양미술대학에 파벨 치스챠코프(Pavel Chistyakov)의 교학 체계를 소개하는 한편, 유화의 위력 속에 폄하되던 전통 회화의 가치를 주장하며 조선화과의 설치를 주도하였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사진 학고재갤러리]

미술가동맹 위원장 정관철은 편지에서 “변선생님이 오시기 전 우리 미술과 지도해 주신 뒤 오늘의 우리 미술은 딴판입니다. 차차 눈이 뜨고 보여지기 시작하니까요”라며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변월룡은 제7차 인민대표대회에 배석하여 김일성과 대의원의 모습을 소묘로 남겼으며, 판문점의 남북 포로교환 현장에서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유화로 남겼다. 변월룡의 작품과 편지들은 어떤 문건이나 기록사진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북한 미술계의 형성 과정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전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평양을 그린 소묘와 유화이다. 인상주의적인 부드러운 색채와 경쾌한 붓질은 스탈린 시대의 도식적 사실주의에서 놓여난, 해빙기 소련화단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북한 땅을 바라보는 따듯한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변월룡과 가까웠던 김용준, 이팔찬, 배운성, 이기영 등 월북 예술인들의 초상화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월북을 단행했던 이들의 형형한 눈빛과 복잡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다. 조선춤을 현대화한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사진)에는 두터운 붓질의 옷 주름, 치마와 부채에 사용된 선명한 분홍과 주황에서 북한체류로 습득된 고려인 특유의 색채 감각을 읽을 수 있다.
 
1954년 9월 건강악화로 소련으로 돌아간 변월룡은, 북한 재입국을 지속적으로 피력했으나 1956년 북·소 관계가 냉각되고, 북한 내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계가 숙청되면서 귀국은 막히게 된다. 변월룡은 동물학자 ‘파블로프스키의 초상’, 외과의사 ‘우글로브의 초상’ 등, 엄격한 소련식 아카데미즘에 기반한 유명인들의 인물화 제작을 이어간다. 그러나 변월룡 작품의 ‘백미’라 할 한국전쟁을 형상화한 흑백 동판화의 선들은 동양화의 묵선을 연상시키며, 화려한 원색의 금상산 풍경에는 조선적 색감이 짙게 배어 있어 북한체류가 그의 작품세계에 남긴 흔적을 짐작케 한다. 소련에선 고려인으로 살아야했고, 북한에선 소련국적 화가로 입국이 거부됐으며, 남한에선 최근까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변계(邊界)의 미술인 변월룡. 소련식 교육 속에 성장하였으나 고려인으로서의 미감을 잃지 않았던 변월룡은 냉전시대 한국미술사의 경계를 넓혀 준 중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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