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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선] 우리 모두가 일본의 ‘반성’을 염원해야 하나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독일 베를린에 가면 하루에 한두 번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지나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포츠다머 광장 사이에, 관광객이 몰리는 연방의회 의사당과 프리드리히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다. 높이가 제각기 다른 짙은 회색 직육면체 석재(총 2711개)가 줄지어 서 있는 독특한 광경은 뭔지 모르고 지나치던 사람의 발걸음도 붙잡는다. 이 공간의 정식 명칭은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직육면체들이 놓인 땅 아래에는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다. 입구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위치와 크기에 놀랐다. 서울로 치자면 덕수궁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고, 크기는 축구장 세 개와 맞먹는다. 일본 도쿄 중심부에 이만한 규모로 ‘전 세계 태평양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를 세워놓았다면 어땠을까. 한국인으로서 그런 상상을 안 할 수가 없다.
 
2014년 6월에 한국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취재하기 위해 남태평양 섬나라 파푸아뉴기니에 갔다. 코포포라는 도시 한편에 6m 높이의 탑이 섰다. 2차 대전 때 그곳에서 일제의 군사시설 공사에 동원된 한국인 4000여 명이 숨졌다. 출장 기간에 오래전에 일본이 세워놓은 위령탑도 봤다. 태평양이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 산 중턱에, 한국 추모비가 선 부지의 서너 배 이상 되는 공간이 조성돼 있었다. 오로지 일본인 희생자를 기리는 장소였다.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현지 주민, 이역만리 섬에 끌려와 연합군 폭격과 굶주림에 희생된 한국인은 해당 사항이 없는 곳이다.
 
다시 독일 이야기다. 유럽에서 독일 과거사가 외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나치를 옹호하거나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이가 등장하면 독일 정부가 바로 나서서 처벌한다. 쿵쿵거리며 뛰는 윗집 아이를 그 집 부모가 하도 세게 혼내는 소리가 들려 아랫집에서 항의할 엄두를 못 내는 것과 비슷하다. 90세가 넘도록 숨어 살던 전범을 체포해 감옥에 보내는 나라다. 1990년대 후반에 독일 의류업체 후고 보스(한국에서의 브랜드 이름은 휴고 보스)가 강제 노역 논란에 휩싸였다. 2차 대전 때 포로나 점령지 주민을 공장에서 강제로 일을 시킨 게 문제였다. 이 회사는 전문가들을 불러 과거사 조사를 맡겼다. 피해자 측과 배상에 합의하고 대표가 강제 노역에 대해 사과했다. 폭스바겐이나 지멘스 등 독일의 대표적 기업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이미 배상 작업을 마쳤다. 독일 기업은 이런 사안은 국가 대 국가의 전후 처리 문제와는 별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금 유럽에서 독일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2차 대전 승전국인 영국은 국내총생산(GDP)이나 1인당 국민소득 면에서 독일에 20%쯤 뒤진다. 하늘에 있는 윈스턴 처칠이 눈물 흘릴 일이다. 프랑스도 자기 살기 바쁘다. 그리스 부도 위기,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유입 등의 유럽 주요 현안에 앞장서는 것은 늘 독일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조건도 독일의 수락 여부에 달렸다. 전후 복구 작업과 통일에 엄청난 비용을 쓰면서도 70년 만에 이렇게 지역 맹주가 됐다.
 
독일이 유럽에서 사실상의 ‘원 톱’이 된 것은 물론 경제력 덕분이다. 그런데 만약 독일이 나치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거나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지금의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마 주변국이 어떻게든 독일의 국제적 영향력을 줄여 ‘교양 없는 왕따 졸부’ 신세에 머물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달리 생각하면 일본의 ‘역사 도발’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범(戰犯)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총리와 각료가 찾아가거나 공물을 보낸다고 뒷목 잡고 욕할 필요 없다. 점잖게 지적하면서 꼬박꼬박 잘 적어 놓으면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유럽국이 독일에 하듯 우리가 경제·외교·안보 때문에 일본 눈치 보는 일이다. 일본이 멈춰 서고 우리가 열심히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뒤처질 수는 없다.
 
일본에서 새 왕이 즉위하면서 ‘아름다운 조화’라는 뜻의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썩하다. 그 문구처럼 세상의 조화를 위해 일본 정부가 우경화에서 벗어나 주변국에 미래지향적 태도를 보인다면? 늘 인상 쓰던 이웃이 갑자기 웃으며 다가올 때처럼 오히려 께름칙하고 무서울 것 같다. 그렇다고 마다할 일도 아니다. 최소한 일본에 화내는 것을 애국의 증표로, ‘토착 왜구’ 혐의에 대한 반증으로 삼는 우리 내부의 유치한 소모전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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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