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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당 학술상]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의 창설 멤버···대한민국 공공의료복지의 기틀 마련

의당 김기홍 박사와 설립 61주년 맞은 국립중앙의료원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북유럽 3국의 의료진과 함께 진료하고 있는 의당 김기홍 박사(가운데). 1958년 임상시험과 의무사, 이듬해 의무관에 임명돼 진료에 힘을 쏟았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북유럽 3국의 의료진과 함께 진료하고 있는 의당 김기홍 박사(가운데). 1958년 임상시험과 의무사, 이듬해 의무관에 임명돼 진료에 힘을 쏟았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립중앙의료원은 우리 정부, 북유럽 3국(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UN한국재건단이 힘을 합쳐 1958년 10월 2일 개원했다. 당시 아시아 최고 시설을 보유한 병원이자 국내 최대 규모 병원이었다. 의사로서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의당 김기홍 박사는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의 위임을 받아 국립의료원 설립 초창기 병원 검사실 기구를 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의무사로 임명받고 임상시험과 근무를 명 받았다.
 
 
"을지로에 있는 메디컬센터(국립중앙의료원)는 75%의 환자를 무료 입원시켜 치료한다고 하는데 언제쯤 개원을 하며 무료 치료를 받는 자세한 절차를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원효로 가난한 환자) 정부 관계자에게 보내온 편지로 1958년 10월 28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됐다. 정식 개원을 눈앞에 둔 국립중앙의료원의 이용 방법을 묻는 문의가 신문사에 빗발쳤다. 서민이 적은 돈으로 최고 시설·장비를 갖춘 초일류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기회를 준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1978년 국립중앙의료원 개원 20주년 홈커밍 행사에 참가한 강상균, 지정희, 한 사람 건너 박승함, 이유복, 김기홍, 박문향 (왼쪽부터).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1978년 국립중앙의료원 개원 20주년 홈커밍 행사에 참가한 강상균, 지정희, 한 사람 건너 박승함, 이유복, 김기홍, 박문향 (왼쪽부터).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6·25전쟁 후 건립된 '스칸디나비아 병원'
1958년 당시의 국립중앙의료원 전경. 총 건평 약 2만3140㎡에 병상 465개를 보유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1958년 당시의 국립중앙의료원 전경. 총 건평 약 2만3140㎡에 병상 465개를 보유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6·25전쟁 후 의료 인프라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정부는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의 도움을 받고 의당 김기홍 박사 등 실력 있는 국내 의사들을 창립 멤버로 해서 국립중앙의료원을 설립했다. 의료 복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당시 극빈자를 국비로 진료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공공의료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로 설립 61주년을 맞은 국립중앙의료원의 역사는 한국 의료복지가 걸어온 길과 맞닿아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의료시설도 의료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 중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한 한국군과 유엔군, 민간인의 인명 피해는 210만여 명에 달했으나 국내 의사와 간호사 수는 1만 명을 밑돌았다. 전쟁 통에 국립 종합병원 54개 중 8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파 혹은 반파됐다. 사립 병·의원도 절반 가까이 타격을 입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UN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은 의료 구호 활동으로 우리나라를 도왔다. 스웨덴은 부산에 군 야전병원단을 파견했고, 덴마크는 적십자 병원선을 부산항과 인천항에 보냈다. 노르웨이는 이동외과병원을 편성해 동두천에서 미 제1군단을 직접 지원하며 민간인을 위한 외래환자 진료소도 운영했다.
 
전쟁이 끝나고 북유럽 3국의 인력은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우리 정부는 계속 남아 의료 지원 활동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북유럽 3국, UN한국재건단(UNKRA)과 협의해 1956년 서울 을지로 6가의 서울시립시민병원 옛 터에 450병상 규모의 국립의료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병원 건설과 운영에 들어간 523만3000만 달러는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 UNKRA가 분담했다. 이 병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이 참여했다고 해서 스칸디나비아 병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 간 조율 
국립중앙의료원에 재직하던 시절의 의당 김기홍 박사(왼쪽 첫째).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립중앙의료원에 재직하던 시절의 의당 김기홍 박사(왼쪽 첫째).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립중앙의료원 설립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 간 메신저 역할을 한 건 고(故) 김기홍 박사와 김종설 박사 등 영어에 능통한 의사들이었다.
 
김기홍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6·25전쟁 중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당시 서울 영등포에 있었던 미 육군 야전병리연구소에 파견돼 병리 검사 기술을 배웠다. 이후 미국에 유학해 레터만 군병원에서 임상 경험을 했다. 김기홍 박사는 의료 지식과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북유럽 3국 의료진과 보건사회부 사이에서 의견을 전달하고 조율하는 한국 측 파트너로 지명됐다.
 
당시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은 검사실 구조를 미국식과 유럽식 중 어느 것으로 할지에 대해 이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병원에서는 임상병리검사를 하나로 된 중앙검사실에서 통합 관리했다. 유럽에서는 병리과·세균과·화학과를 분리해 3개 검사실 체제로 운영했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우리나라와 북유럽 3국 간호사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우리나라와 북유럽 3국 간호사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다.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김기홍 박사는 미국식을 유지하려는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개원 당시에는 북유럽 3국의 의료제도 그대로 임상검사 분야가 병리·화학·세균 3과로 나뉘었다.
 
김기홍 박사는 국립중앙의료원 창설의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10월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의무사로 임명받고 국립중앙의료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의무관으로 임명됐다. 1960년 10월 재단법인 우석학원 산하 수도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수석의무관으로 근무했다.
 
1958년 10월 2일에 개최된 국립중앙의료원 개원식 장면.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1958년 10월 2일에 개최된 국립중앙의료원 개원식 장면. [사진 한세예스24문화재단]

 
 
아시아 최고 시설···465개 병상 보유 
국립중앙의료원은 1958년 10월 2일 개원했다. 개원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북유럽 3국 정부 대표, 대사 등이 참석했다. 7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총 건평 약 2만3140㎡(7000평)에 병상 465개를 보유했다. 650명의 한국인 직원과 의사·간호사·행정직원 등 북유럽 3국에서 파견된 인력 89명이 근무했다.
 
당시 아시아 최고 시설을 보유한 병원이자 국내 최대 규모 병원이었다. ▶내과나 외과가 전문 분야별로 나뉘어 독립돼 있는 점 ▶마취과가 있는 점 ▶X광선실이 3개나 있는 점 ▶머리 내부를 촬영하는 X광선기가 있는 점 ▶회복실과 혈액은행이 함께 있는 점 등이 국립중앙의료원만의 특징이었다.
 
 
전체 환자의 75%를 국비로 지원 
개원 후 국립중앙의료원에는 외래환자가 밀려들었다. 당시 국내 종합병원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서비스를 제공해 주한 외국인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났다. 병원장과 북유럽 3국 사절단장이 합의해 ‘외국인 환자 구좌’를 개설해 치료비를 미화로 받기도 했다.
 
전체 환자의 75%를 국비로 지원한다는 내부 규정을 뒀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많이 내원했다. 국비 환자는 ▶요즘의 주민세와 재산세에 해당하는 호별세(戶別稅) 등급이 5등급 이하인 극빈자 ▶천재지변 또는 이에 준하는 돌발 사고를 입은 자 ▶질환과 병상이 특이한 의학상 연구 대상자 ▶기타 보건사회부 장관이나 구호시설의 장이 진료를 의뢰하는 자 등으로 제한했다.
 
국비 환자가 늘어나다 보니 설립 당시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이 합의한 자비 환자 25% 비율이 지켜지지 않았다. 자비를 내는 환자에 대해서도 하루 1100원에 입원료·약대·처치수술료가 포함되는 포괄수가제를 채택해 병원 수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설립 후 10년간 북유럽 3국과 우리 정부가 공동 운영하다 1968년 운영권이 우리 정부로 완전히 넘어왔다. 이 무렵부터 국내 대학병원의 시설 확충과 신축 개원이 계속되면서 국립중앙의료원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전쟁 후 의료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던 우리나라 국민이 우수한 의료진과 시설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공공 의료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이후 적자에서 벗어나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1990년대 후반부터 공사화, 민영화, 특수병원 전환 등 경영 체제 변화를 추진하다 2009년 특수법인으로 전환됐다.
 
중앙일보디자인=김승수 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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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