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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어떤 샤워를 하고 있나요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 살다 보면 문득, 정리되지 않은 하루에 다음날을 덮어쓰는 일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면내시경 검진도 아닌데 “오늘 하루 어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었다 깬다. 여기에 공감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늘 아침에만 하던 샤워를 한 번 밤에 해 보시기를 추천해 본다.
 
외출을 앞두고 하는 아침 샤워는 중심된 목적이 나보다는 남에게 기울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것을 대비해 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요한 일출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아침형 인간이라면 다르겠지만, ‘알람 없이도 깰 사람’이 ‘법 없이도 살 사람’보다 신기한 내겐 그렇다. 옆집까지 들릴듯한 알람 소리에 어리둥절 깨어나면 나가야 하는 시간이 데드라인이 돼 초읽기가 시작되는데, 샤워는 그 전에 후닥닥 해치워야 하는 잡스러운 과제 중 하나이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결과만이 중요해서, 기쁨이나 즐거움보단 귀찮음이나 의무감을 선사한다.
 
밤 샤워는 긴장해 있어야 하는 낮 시간에는 가질 수 없던 태도를 극단적으로 누려볼 수 있는 때다. 시간이 몇 분쯤 흘렀는지, 누구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있되 머리는 지끈거리며 보냈다면, 이 시간만큼은 가만히 서 있되 멍하니 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머릿속은 자연스레 하루를 정리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물 쓰듯’ 쓸 수 있는 것은 정말 물 뿐일 때가 많아서, 제약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동안 맞고 있노라면 사치스러운 만족감마저 든다. 시각·청각·미각이 피곤한 하루를 보낸 뒤 후각·촉각이 주는 행복을 양껏 누리는 것은 덤이다.
 
“오늘 샤워 어땠어?” 영국의 루비 왁스라는 코미디언이 동료한테서 듣고 지나친 말이라고 한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나서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뭔 샤워 얘기’라며 넘겨 버린 것을 돌아봤단다. 사실은 샤워가 아니어도 좋고, 밤이 아니어도 좋다. 목표와 마감, 속박과 연결 속에서 바쁘게만 달렸다면 하루 한순간만큼은 그걸 다 끊고 나만을 위해 잠시 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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