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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또 짐 싼다…끝나지 않은 신격호의 비극

두 아들 감정싸움에 집무실 옮기는 롯데 명예회장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지난 2017년 5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를 찾았다. 개관 한달 뒤였다. [중앙포토]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지난 2017년 5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를 찾았다. 개관 한달 뒤였다. [중앙포토]

백수(白壽·한국 나이 99세)를 맞은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또 짐을 싼다는 소식이 최근 들려왔다. 지금 머물고 있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49층을 떠나 옛 집무실인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이그제큐티브 타워(구 롯데호텔 신관) 34층으로 컴백한다고 한다. 가보니 지난해 8월 리노베이션이 끝난 다른 층과 달리 34층은 집무실을 비롯해 전체 출입이 막혀 있었다. 롯데지주 최민호 수석은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5월 말이나 6월 초 이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무리 국내 재계 순위 5위(자산 총액 기준)인 대기업 창업주라지만 원래 사용하던 신관 3450호를 그대로 카피하느라 인테리어에만 10억 원 이상 들인 새 집무실을 불과 1년여 만에 떠나야 할 무슨 대단한 속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치매 부친 집무실 놓고 형제 다툼
갈등 커지자 ‘성년후견제도’ 도움
2013년 도입 후 1만명 이용
치매인구 큰 폭 늘며 수요 커져

 
미리 답부터 말하자면, 그런 사정은 없다. 그저 지난해 11월 가정법원 결정에 따른 후속조치일 뿐이다. 좀 더 정확히는 한·일 국경을 오가며 지루한 경영권 다툼을 벌였던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 두 아들의 끝나지 않은 감정 다툼에 치매 걸린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시 한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2018년 1월 신관 리노베이션 와중에 30년 머물던 옛 거처를 떠날 때도 그랬듯이, ‘신격호의 평생 꿈’의 집약지인 국내 최고층빌딩(롯데월드타워) 생활을 접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역시 신 명예회장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경영권을 장악한 차남은 고령을 내세워 지난 2017년 4월 개관한 ‘뉴 롯데’의 상징인 롯데월드타워에 아버지를 계속 모시려 하고, 지분은 다 팔았지만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진 장남은 ‘공사 후 다시 이전’이라는 단서조항을 앞세워 아버지를 롯데월드타워 밖으로 빼내겠다고 고집을 부릴 뿐이다. 양측이 대립하니 이번에도 그때처럼 법원이 나서서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줬다. 신 명예회장으로선 내 돈 써서 내 살 곳 정하는데 정작 내 뜻은 온데간데없는 기막힌 상황에 처한 셈이다.

 
신격호가 누군가. 한국 정치를 풍미한 삼김(三金·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친분을 유지하며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사이 다리 역할을 해 3당 합당에 일부 기여하기도 한 거물이자,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이방인으로 차별받으면서도 20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걸출한 기업인 아닌가. 틈만 나면 “임직원이 몇 명이냐”고 불쑥불쑥 물을 정도로 평생 직원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 정신’이 머리에 가득했던 인물이 자기 몸 하나 머물 장소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걸 보고 있자면 치매의 비애가 더욱 크게 와 닿는다.

 
비단 신 명예회장뿐만이 아니다. 다른 여러 굴지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오너 일가의 몇몇 인사를 비롯해 75만 명에 달하는 국내 치매 노인들이 지금 맞닥뜨린 현실이다. 이번 법원 결정 등과 관련해 그가 받고 있는 ‘성년후원제도’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10월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신 명예회장 집무실을 놓고 관할 충돌을 벌일 당시 신 전 부회장측이 롯데호텔 신관 집무실을 공개했다. 응접실 가구 등 일부 집기는 지난해 롯데월드타워로 이주할 때 가져갔고, 이번 이사와 함께 다시 들여온다. [중앙포토]

2015년 10월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신 명예회장 집무실을 놓고 관할 충돌을 벌일 당시 신 전 부회장측이 롯데호텔 신관 집무실을 공개했다. 응접실 가구 등 일부 집기는 지난해 롯데월드타워로 이주할 때 가져갔고, 이번 이사와 함께 다시 들여온다. [중앙포토]

신동주 전 부회장이 2017년 내려던 『나의 아버지 신격호』에 따르면 2013년 12월 소공동 집무실에서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은 게 치매 발병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신 명예회장의 치매는 2015년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한 ‘형제의 난’으로 이어졌고, 양측간 갈등은 아버지 집무실 관할 다툼의 형태로 외부에 표출됐다. 상대 출입을 막거나 CCTV 감시 논란을 빚는 등 충돌이 극한으로 치닫자 2016년 8월 신 명예회장 여동생 정숙씨는 가정법원에 ‘성년후견’을 청구했다. 성년후견제도란 치매 등 정신적 제약이 있는 피(被)후견인(신 명예회장)의 재산뿐 아니라 거주지 이동 같은 일상생활과 관련해 최대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2013년 7월 도입한 제도다.

 
당시 심리를 맡은 서울가정법원(가사20단독 김성우 판사)은 “자녀들 사이에 신상보호 및 재산관리, 회사 경영권 등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어 한쪽에 후견업무를 맡기면 분쟁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정후견’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후견인이 전면적인 대리권한을 갖는 ‘성년후견’이나 피후견인이 스스로 후견인과 계약하는 ‘임의후견’과 달리 ‘한정후견’은 제한적인 대리권을 갖는다. 또 당시 재판부는 “신 명예회장(당시 총괄회장) 본인의 복리를 위해 중립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후견사무를 할 수 있는 전문가 후견법인을 선임했다”며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대표변호사가 있는 법무법인 원이 설립한 사단법인 선을 선임했다. 신혜성 서울가정법원 공보관은 “피후견인의 재산이나 경력 등을 감안해 개인 후견인이 감당하기 어려우면 법인 후견을 지정한다”며 “후보 명부에 오른 법인 후견인 19곳 가운데 사건 내용을 검토해 이해충돌이 없는 곳을 적절히 안배해 지정한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선 이외에 법무법인 율촌의 사단법인 온율, 대한법무사협회의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 순복음노원교회의 사회복지법인 성민 등이 등재돼 있다.

 
신 명예회장의 비극은 한정후견인 지정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형제가 여전히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어서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본인을 후견인으로 선임해줄 것을 청구하는 한편 법원의 한정후견인 지정에도 불복했으나 기각됐다. 이후 한정후견인 교체도 청구했으나 역시 지난 29일 기각됐다. 이번 집무실 이전도 그 다툼의 연장선에 있다.

 
엄연히 법정 후견인이 있는데도 매번 이렇게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재산 처분은 물론 거주지 이전 역시 ‘한정후견인’의 지정된 권한을 넘어서는 업무라 법원의 허가가 필요하다. 일부에선 이렇게 대립되는 사안마다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면 후견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신 명예회장을 담당하고 있는 사단법인 선 김병주 변호사는 “중립적인 후견인이 요청한 권한 행사에 대해 법원이 허가를 내리는 형식이라 양쪽의 문제 제기가 있더라도 후견인이 없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제한적이고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후견업무와 관련한 비용은 이해가 맞서는 친족이 아니라 피후견인 자산에서 나가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년후견제도 얼마나 이용하나

성년후견제도 얼마나 이용하나

국내 노인 인구 679만 명 가운데 치매 추정 환자는 열에 하나꼴인 66만 명(중앙치매센터 2017년 말 기준)에 달하고 매년 크게 느는 추세다. 그런데도 지난 2013년 7월 ‘성년후견제도’ 도입 후 1만여 명만이 ‘성년후견제도’를 이용할 만큼 아직은 저조한 편이다.

 
신 명예회장 집무실 다툼을 계기로 이 제도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다 보니 대기업 오너 등 재산이 많아 친족간 갈등이 빚는 사람만을 위한 제도로 오해받아서다. 현재는 중견기업 오너 등에서 수요가 많긴 하다. 하지만 법원 명부엔 법인 후견인뿐 아니라 개인 후견인도 있고, 또 가족이 없는 경우엔 정부 기관이 나서서 대신 후견을 요청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14년 20억 원대 자산가임에도 가족이 없다 보니 치매에 걸려 생활쓰레기가 쌓인 자택에서 홀로 방치됐던 전모씨가 검찰 청구로 법인후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 지난 2018년 9월엔 재산이 없는 독거노인 등을 위한 치매공공후견제도까지 도입됐다.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치매고령자 등을 위한 의사결정지원 기본법 제정 세미나’에 발제자로 나선 법무법인 율촌 박은수 고문은 “고령자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자신이 축적한 자산을 활용해 간병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은 감소될 것”이라며 좀 더 정교한 제도 정비를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친족이 빼돌리거나 상속을 염두에 둔 탓에 사용하는 데 소극적이라 본인은 본인대로 불행하고 사회적 비용도 발생하는 실정이다.

 
어쩌면 신 명예회장은 의도치 않게 우리가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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