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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의 시선] 뜬금없는 리디노미네이션 논란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요즈음 언론을 타고 있다. 한은의 본업인 금리 문제가 아니라 화폐단위 개혁(리디노미네이션)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그야말로 논의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는 꽤 오래전에 해 놓은 게 있다”고 했다.
 

한은 총재가 “필요하다” 제기
금융 90%가 전자거래되는 시대
화폐단위 바꾸는 게 의미 있을까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1000원을 1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 총재는 2015년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당시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화폐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필요성은 공감한다. 다만 한은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제기할 만큼 한은 총재의 리디노미네이션 소신은 강한 것 같다.
 
이 총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제 주변에서 화폐단위로 인해 겪는 불편이 있긴 하다. 물건값은 이미 최소 100원 단위로 매겨져 있는데 뒤의 ‘00’을 더 적는 건 어쩌면 낭비다. 이 때문에 어떤 커피숍에선 5000원을 5.0으로, 2500원을 2.5로 적는 식으로 자체적인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기도 한다. 환율 계산 때의 불편함도 거론된다.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는 현재 1달러당 1136.50원이다. 일본 엔화에 대해선 100엔당 1015.46원이다. 일각에선 이런 점을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달러 당 가치가 네자릿수인 나라는 없다’며 한 나라 경제의 위상을 반영하는 원화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8년부터 주요 통계에 1000조 단위를 뛰어넘는 경(1 뒤에 ‘0’이 16개)이 등장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하지만 화폐가치 변경은 국가 대사 중의 대사다. 모든 국민의 일상이 바뀌고 사회 변화까지 불러온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와 여건이 조성돼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자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가게도 있지만, 중소기업에선 여전히 원가 계산에서 1원을 따진다. 국가 통계를 계산할 때 숫자가 커지는 불편은 잘해야 한은과 기획재정부 등 일부 부처의 일부 공무원에 해당하는 일이다.
 
화폐단위가 경제의 위상을 반영한다는 얘기는 더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 달러가 1100원대라고 해서 미국 경제가 한국의 1100배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달러의 10분의 1 가격인 엔화로도 1980년대 세계 경제 1위 자리를 노린 바 있다. 1리라당 원화가치가 200원이라고 해서 터키 경제가 한국보다 200배 더 좋은 것도 결코 아니다. 현재 세계에서 화폐가치가 가장 높은 나라들은 쿠웨이트·바레인·오만 같은 중동국가들이다. 이들 나라는 석유 덕분에 부국이 됐지만, 사회적 불평등이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심각한 문제를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디지털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융거래만 해도 90%가량이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이뤄진다. 5만원이나 만원짜리 뿐 아니라 10원이나 100원도 IC 카드가 알아서 계산한다.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세상에서 굳이 화폐단위를 바꿔 혼란을 초래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과거 역사를 봐도 경제에 문제가 없는 평화 시에 굳이 화폐단위 변경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쟁통에 치러진 긴급조치였던 1950년 1차 통화 조치를 빼고 1953년과 1962년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있었다. 첫째는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책이었고, 둘째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 다잡기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현금과 예금 동결로 산업이 더 위축돼 박정희 본인이 인정한 실패로 끝났다.
 
유럽이 유로화를 채택한 즈음 미국과 유럽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장 간 적이 있다. 당시 1유로 가치는 1.4달러 정도였다. 공항에서 물 한 병씩을 사려고 했는데 미국에선 모두 1달러, 유럽에선 1유로여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0.88유로로 표기하느니 아예 1유로를 붙여놓는 것처럼 화폐단위라는 마술 때문에 자연스레 물가 상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화폐개혁으로 20억원짜리 아파트가 2000만원이 됐다고 해서 그 가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꺾이는 경기를 되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시기다. 3조원을 넘게 들여 돈을 새로 찍어내고 은행과 여러 전산기기의 단위를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지금은 지갑과 주머니에 10원짜리부터 5만원짜리까지를 넣어두고 있어야 생활이 가능한 시절이 아니다. 100원, 1000원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국민의 수치 이해력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지금 얘기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영 뜬금없이 느껴진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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