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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 안주에 진한 생맥주···'을지로 노가리' 원조 사라질판

 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노가리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손님이 몰려든다. 을지로3가, 아니 서울의 명물 골목이다. 이 골목은 1980년 을지OB베어의 창업으로 시작됐다. 김경빈 기자

노가리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손님이 몰려든다. 을지로3가, 아니 서울의 명물 골목이다. 이 골목은 1980년 을지OB베어의 창업으로 시작됐다. 김경빈 기자

서울 을지로3가 한 뒷골목. 초저녁부터 생맥주에 노가리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골목이 가득 찼다. 저녁에는 노상에 간이 탁자를 깔기 시작한다. 당국이 이 골목의 특징을 고려해 양성화 조치를 해줬다. 속칭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어느 저녁 풍경이다. 손님들로 만원인 한 작은 가게. 그러나 업주는 슬픔에 잠겨 있다.  
 

40년 영업 '을지OB베어' 건물주와 소송

“40년간 장사 해왔는데, 건물주가 나가라고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 가게가 어떤 가겐데….”
주인 강호신(59·을지OB베어)씨의 한숨이다. ‘노가리골목’ 또는 ‘을지페스타’라고 불리는 이 골목의 원조 가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노가리골목’이란 을지OB베어에서 처음 노가리를 주 안주로 팔았고, 이후 다른 가게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서울의 명물 골목이 되어 붙은 이름. ‘을지페스타’는 독일의 유명한 맥주 축제를 패러디한 이름으로 5월부터 거리 전체가 맥주를 즐기려는 애호가로 들썩이기 때문에 붙었다. 외국인 관광객도 골목의 명성을 알고 있어 많은 수가 몰려든다. 서울에서 제일 싼 수준의 생맥주 값에 소박한 안줏값, 무엇보다 야간 노상 음주라는 흥취가 돌기 때문이다. 
 
을지OB베어 정문에 내걸린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표식과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 표식. 김경빈 기자

을지OB베어 정문에 내걸린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표식과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 표식. 김경빈 기자

이 골목은 ‘서울미래유산(서울특별시)’으로 지정됐다. 골목의 정체성 자체가 보존가치가 있다고 당국이 선정한 것이다. 물론 원조인 을지OB베어가 유산의 핵심이다. 최근에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백년가게’ 인증서도 받았다. 백 년 이상 오래 가야 할 가게라는 뜻이다. 이른바 오래된 가게를 뜻하는 ‘노포’의 존재가 도시와 산업에 활력에 불어 넣어준다는 판단에서 이런 인증제도가 시작됐다. 그러나 가게는 문을 닫을지 모른다. 현재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서 명도소송이 진행 중이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 건물주 측에서 나가라고 했고, 세입자는 “더 장사를 하고 싶다”고 버티고 있어서다.
 
“아버지가 1980년 시작한 가게입니다. 개업 후 3년 동안 스티로폼 깔고 6평짜리 업장에서 주무시며 일하셨어요. 동네에 신임을 얻으려면 주인이 성실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 전설적인 가게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창업 당시 가게는 현재도 그 자리이며, 6평이라는 좁은 면적과 벽돌로 된 고정 탁자도 변함없다. 10여 명이 들어서면 꽉 찬다. 을지OB베어는 단골이 엄청나게 많다. 특히 과일 향이 나는 생맥주 맛이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맥주가 싱겁다는 말은 이 집 맥주를 맛보면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가 돌 정도다. 최상품의 작은 북어와 황태 두 가 가지가 원조 안주. 1000원이라는 가격은 비현실적이다. 원가 이하라는 말도 있다. 
 노가리골목에서는 연탄불에 맨손으로 노가리를 굽는다. 골목의 상징인 작은 북어와 황태. 과거의 초미니 노가리는 쓰지 않는다. 김경빈 기자

노가리골목에서는 연탄불에 맨손으로 노가리를 굽는다. 골목의 상징인 작은 북어와 황태. 과거의 초미니 노가리는 쓰지 않는다. 김경빈 기자

“아버지가 두 해 전 은퇴하셨어요. 그때 ‘노가리값 올리지 말고 단골 홀대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직 건재하시니 마음대로 올릴 수가 없어서….” 
 
강씨는 맥주를 뽑고 남편 최수영(64)씨는 노가리를 굽는데, 손이 온통 검게 그을렸다. 집게 쓰지 말고 손으로 연탄불에 구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따르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손은 늘 1도 화상 상태다. 연탄불의 열기를 견디며 굽다 보니 손에 ‘내성’이 생겼다. 어지간하면 뜨거움을 못 느낀다. 노가리 굽기 ‘생활의 달인’ 급이다.  
 을지OB베어 창업자 강효근(92)옹.은퇴한 그는 자신의 가게가 40년 만에 쫓겨날 상황을 모른다. [사진 노중훈]

을지OB베어 창업자 강효근(92)옹.은퇴한 그는 자신의 가게가 40년 만에 쫓겨날 상황을 모른다. [사진 노중훈]

창업자 강효근(92)옹은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1·4 후퇴 때 월남해 겨우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80년에 공구상 골목이었던 이 자리에 들어와 생업을 일궜다. 당시 을지로3가역 역무원들이 단골이었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었는데, 역무원이 교대하고 아침 술(?)을 마시러 왔다.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퇴근 시간이자 저녁이었기 때문이었다. 생맥주 값이 당시 300원대. 작은 노가리가 1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국내 최대 맥주회사였던 OB맥주가 ‘OB베어’ 브랜드를 단 체인점을 모집하고 있었고, 1호점이 바로 이 가게다. 맥주 통은 반드시 냉장고에 직접 연결된 디스펜서로 뽑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방식을 지키고 있다. 이른바 호프 기계의 탄생이다. 요즘은 공간 효율을 극대화하고 간편하게 뽑기 위해 순간 냉각식이 대세다. 호프 기계가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고 해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을지OB베어는 현재 딸 부부에게 이어지고 있다. 퇴거 위험 앞에서 백년가게의 꿈이 저문다. 김경빈 기자

을지OB베어는 현재 딸 부부에게 이어지고 있다. 퇴거 위험 앞에서 백년가게의 꿈이 저문다. 김경빈 기자

“케그(맥주 통)가 들어오면 일단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맛 변화를 막기 위해서죠. 그다음에 냉장고에 연결된 디스펜서로 옮겨 추출합니다. 당연히 맥주 맛이 잘 유지되는 것이죠.” 
 
강씨의 설명이다. 원조 노포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맥주 맛이 단골을 많이 만들었다. 매일 맥주 맛이 조금 다른데, 날씨에 따라 기압의 미세한 조정, 따르는 손맛이 그때그때 달라진다. 나는 비 오는 날 이 집 맥주를 좋아한다. 저기압이면 탄산가스 압력도 떨어져 보통은 맥주 맛이 떨어진다. 톡 쏘는 맛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은 무슨 비결이 있는지 더 맛있고 좋은 향을 낸다. 가스가 덜 들어가는 대신 잘 보관된 맥주 자체의 깊은 맛이 표현돼 그런 듯하다. 국산 맥주가 맛이 가볍다고 홀대받곤 하는데, 이 집 맥주 맛을 보면 그런 말이 쑥 들어간다. 호프집은 80년대 크게 히트한 서민의 술집 문화인데, 이제 오래된 가게는 거의 없다.  
 맥주를 따르고 있는 강호신 대표. 을지OB베어는 OB베어 1호 체인점이다. 김경빈 기자

맥주를 따르고 있는 강호신 대표. 을지OB베어는 OB베어 1호 체인점이다. 김경빈 기자

노가리골목에는 여러 가게가 있다. 을지OB베어 맞은 편에 89년 창업한 ‘뮌헨호프’, 그 아래로 ‘초원호프’ 등이 성업하고 있다. 가장 큰 가게는 ‘만선호프’다. 이 라인에만 6개 가게를 가지고 있다. 뮌헨호프·초원호프가 들어선 라인이 재개발될 계획이 있었다. 현재는 을지로3가의 정체성에 관한 반대에 부딪혀 답보 상태다. 만약 그 라인이 재개발되면, 노가리골목은 한쪽 라인만 남게 된다. 규모 자체가 반으로 축소된다. 더구나 한쪽 라인에는 만선호프 업장 6개가 있어 다른 가게는 을지OB베어 하나만 남는다. 건물주의 퇴거 요구로 이 가게까지 사라지면 노가리골목은 옛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 
 
손님들은 5월 16일 오랜 단골들이 이 가게에서 전통의 생맥주를 마시며 대책을 논의한다고 한다. 가게가 좋아 손님들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모이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취재 당일, 마침 몇몇 단골이 모였다. 
 “OB베어가 사라지면 노가리 골목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가게가 생기면서 골목도 생겼는데(이동만씨·57).” 
 “할아버지(강효근옹)가 만든 이 가게가 사라진다고 하면 이제 이 골목을 오지 않겠지요. 제 청춘의 추억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김진석씨·58).”
돌아서는 골목길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5월 10~11일 열리는 을지로 노가리축제를 홍보하는 만국기였다.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 ‘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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