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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세월호 트라우마 심해 ‘각자도생’ 심리 퍼져

[세상을 바꾸는 지식인] ‘거리의 의사’ 정혜신
비좁은 자기 영역에 갇히기보다 세상과 소통하며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세상을 바꾸는 지식인, 가능성을 현실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사들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56)씨는 거리의 의사라고 불린다. 15년 전 진료실을 뛰쳐나와 국가폭력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 등을 돕는 일을 해왔다. 지난해 10월 심리적 ‘심폐소생술(CPR)’ 개념을 내세운 『당신이 옳다』(해냄)를 출간한 이후로는 거리의 치유자 역할을 하고 있다. 100회 넘게 전국의 동네서점, 도서관에서 워크숍을 열어 고민상담을 했다. 병원에 갈 여유조차 없는 응급환자에게 CPR을 실시하는 것처럼 심리적 CPR을 응급 실시해 다독거려야 하는 벼랑 끝 마음들이 우리 사회에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그가 그리는 한국인 마음의 지도는 어떤 것일까.
 
OCI 미술관에서 만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상처받아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무조건 당신이 옳다고 해줘야 한다“고 했다. [사진 임안나]

OCI 미술관에서 만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상처받아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무조건 당신이 옳다고 해줘야 한다“고 했다. [사진 임안나]

 
『당신이 옳다』 출간 후 100차례 워크숍
 
워크숍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가하나.
“여성이 7대 3의 비율로 많다. 직업별로는 교사가 많은 것 같다. 교육현장에서의 무기력감을 호소한다. 부모를 설득해 손잡고 오는 10대도 있다.”
 
주로 어떤 점을 호소하나.
“모든 인간의 고통은 개별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로 봐주는 시선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 같다. 가령 직장에서는 에어컨이나 컴퓨터 같은 부품 취급을 받는다.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는 휘발된다. 존재의 소멸이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 시선, 사회적 공기 속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어른인데, 장남인데, 과장인데, 대표인데,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지’ 하면서 정작 왜 아픈지, 왜 외로운지, 왜 불안하고 막막한지 모르면서 살아가는 거다.”
 
한국사회는 일상적으로 심리적 CPR이 필요할 만큼 살기 어려운 상태인가.
“책에도 썼지만, 대기업 오너나 샐러리맨으로 입사해 별을 단 CEO나 임원, 정치인이나 법조인들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한다. 그럼 그들이 행복해야 하잖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분량에서 우리 사회는 거의 평등하다. 계층과 상관없이 똑같이 고통받는다. 다른 나라라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훨씬 극단적인 것 같은데,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성공은 대개 자기 억압의 결과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성공하느라 감내한 심리적 대가를 성공한 다음 치르기 시작한다.”
 
통시적으로는? 갈수록 팍팍해지나.
“과거 한국전쟁 당시의 고통은 종류가 다른 것 같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한국전쟁만큼이나 우리 사회에 깊숙한 내상, 트라우마를 입혔다고 본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는 생각이나 예측 가능성, 신뢰를 깨트렸다. 경제적으로 IMF 위기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심리적으로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도, 세상 누구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으니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심리가 퍼졌다. 스스로 피해자라고 여기면서 상대를 가해하며 살아간다. 세월호 참사는 그에 더해진 2차 트라우마, 이를테면 확인사살 같은 것이었다.”
 
청년실업 문제처럼 심리적 CPR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사람 마음이 가령 연봉이 얼마라고 해서 기계적으로 안정되는 게 아니다. 존중받거나 보살핌받는다는 느낌이 없으면 아무리 물리적으로 채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왜냐하면 정서적인 부분이 존재의 핵심이고 실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페미니즘 이슈에 극도의 혐오반응을 보이는 젊은 남성들 문제도 그렇다. 그들은 차별을 느끼고 코너에 몰린 경우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성인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몽적으로 교육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어떤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 뭔가 억울해서 그러는 사람들은 ‘아, 그랬구나, 네가 그래서 화가 났구나’ 이렇게 얘기해줘야 한다. 그럼 혐오와 분노가 자연히 줄어든다. 태극기 부대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평생 억울하다고 생각”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 말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사람의 마음이나 느낌, 감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할 때 속옷까지 벗기고 심장 정중앙에 정확하게 힘을 가해 마사지를 해야 심박동이 돌아오듯 상대의 느낌, 감정에 정확하게 공감해야 한다.”
 
상대의 감정이 궁금하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고, 그에 응해 상대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은 것만으로 치유가 이뤄지나.
“그렇다. ‘내 남편이 내 마음에 대해 정말로 궁금해하네’, 아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만으로 굉장한 도움이 된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요즘 마음이 어때?’ 물어보면,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럴 거잖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맨날 똑같지 뭐’ 하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 ‘그러게, 요즘 내 마음이 어떻지?’ 하면 이미 어느 정도 소통이 이뤄진 거다. 며칠 있다가 ‘당신이 물어봐서 생각해봤는데 나 요즘 다 때려치우고 싶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라고 하면 거기서부터 존재와 존재가 진짜로 만나기 시작하는 거다. 감당할 수 없는 얘기가 나올까 봐 마음이 어떤지 못 물어볼 수도 있는데, 치유의 핵심은 전문가적인 처방이 아니라 단지 ‘아 그랬구나, 당신이 그런 심정이었구나’ 그 말이면 된다. ‘누구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아 그랬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구나’ 그거면 된다. 존재의 핵심인 감정과 느낌을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수용해주는 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지면 사람은 그 순간 급속도로 심리적 충전이 이뤄지고 심리적 곳간이 채워진다. 가장 여유 있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그게 정확한 공감의 힘이고, 당신이 옳다는 내 주장의 내용이다. 이런 원리를 알면 우리 사회가 겪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나는 너무나 확신한다.”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착한가.
"착하다, 착하지 않다, 그것도 하나의 판단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옳다. 용납하기 어려운 악한 감정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면 다시 돌아온다. 나는 지금까지 이 판단에서 벗어나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금 억울해한다고 하지 않나. 나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는 평생 억울한 경우였다. 아무도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스스로 그 감정들을 평생 통제하면서 그 자리까지 오른 건데 그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이 생긴 거다. 70~80년대 고문 피해자들을 상담하다 보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가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면 나는 거기에도 어떤 개인적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치유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 안 한다. 실제로 치유 의뢰가 들어온다면 그걸 맡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이런 공적 활동의 원동력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나는 한 번도 공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의무감에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끌리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 입장이어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즐거움은.
"별로.”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우군을 확보하는 삶의 기술 같은 게 있다면.
"내게 그런 욕구가 있다는 점을 먼저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그럼 내가 관계 맺은 사람들 가운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수 있다.”
 
“해야 한다는 ‘슈드비 콤플렉스’에 빠지면 획일화돼”
1 2018년 펴낸 『당신이 옳다』 2 6주간의 힐링기록 『당신으로 충분하 다』 3 진은영 시인과 함께 쓴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1 2018년 펴낸 『당신이 옳다』 2 6주간의 힐링기록 『당신으로 충분하 다』 3 진은영 시인과 함께 쓴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정혜신이 지금까지 펴낸 책들은 풍성한 상담 사례 보고서다. 읽는 것만으로 사람 마음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되는 책들이다. 2013년 책 『당신으로 충분하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반드시~해야 한다’는 견고한 자기 굴레를 ‘슈드비 콤플렉스(should be complex)’라 한다 (…) 슈드비 콤플렉스에 과하게 휘둘리면 사람은 당연히 획일화된다. 심리적 분화가 일어나기 어려우니 사고의 방식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79쪽)
 
2015년 책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에서는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언니의 헛것을 보는 중학생 동생에 대해 미처 마치지 못한 심리적 작업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다독인다. (46·47쪽)
 
『당신이 옳다』에서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려는 사람은 공감자가 아니라 혹독한 감정노동으로 웃으며 스러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171쪽)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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