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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가 연주하면 여성팬들 쓰러져…그가 쇼팽과 다른점은?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0)
연주회의 리스트. 리스트는 광적인 팬을 몰고 다니는 당대의 최고 연주 스타였다. 그림 속의 한 여인은 쓰러져있다. 테오도르 호세만 그림, 1842.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연주회의 리스트. 리스트는 광적인 팬을 몰고 다니는 당대의 최고 연주 스타였다. 그림 속의 한 여인은 쓰러져있다. 테오도르 호세만 그림, 1842.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1810년생)과 리스트(1811년생)는 나이도 비슷했고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주위에 알려진 것도 비슷했다. 이 때문에 둘의 비교는 어쩔 수 없었다. 1822년 12월, 11세의 리스트는 빈에서 첫 대중 연주회를 가졌다. 라이프치히의 ‘세계음악신문’은 그를 하늘이 내린 어린 거장이라며 그의 연주는 놀라운 것이라고 썼다.
 
이듬해 2월에는 바르샤바의 자선 연주회에 쇼팽이 출연했다. 바르샤바의 신문은 “하늘이 내린 빈의 천재 리스트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바르샤바에는 그에 맞먹거나 혹은 더 완벽한 하늘이 내린 바르샤바의 자랑거리 쇼팽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실었다.
 
당대 음악계의 최고 스타였던 리스트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는 외향적인 성격에 사회 활동도 적극적이었고 당대에 끼친 영향도 컸다. 쇼팽과 리스트, 두 사람의 재능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살아온 과정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다.
 
리스트는 헝가리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담은 첼리스트였기에 리스트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접했다. 6세의 아들이, 낮에 들은 연주를 저녁에 재현하는 것을 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가르침을 깨우치는 것은 빨랐다. 아들의 재능에 확신한 아버지는 빈으로 옮겨갔다.
 
열 살의 리스트는 당시 유명한 피아노 교사 체르니에 맡겨져서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 교본을 쓴 사람인데 레슨비를 높게 책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스트의 재능에 반해서 그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리스트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 손가락을 발달시켰고 암보(暗譜) 능력도 익혔다.
 
13세의 리스트. 강요된 연주여행에 지친 모습이다. 프랑수아 르 빌랑 그림, 석판화.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3세의 리스트. 강요된 연주여행에 지친 모습이다. 프랑수아 르 빌랑 그림, 석판화.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체르니에 배운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대중 연주회를 열었고 청중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위에서 소개한 세계음악신문의 호평을 들었다. 빈에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던 아버지는 당장 돈벌이를 생각했고 아들을 데리고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을 돌아 문화의 중심지 파리로 가는 연주 여행을 기획했다. 그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가는 곳마다 어린 신동은 놀라운 암보 능력, 즉흥연주실력, 처음 본 주제를 바로 변주하는 능력을 선보여서 청중의 열광을 끌어냈다.
 
파리에 짐을 내려놓은 그는 12살에 오페라도 작곡하였다. (내용은 그리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도착하자 리스트의 어머니는 그곳에 안착해서 살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상품성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떼놓고 아들과 연주 여행을 계속했다. 어린 리스트는 ‘서커스의 동물’로 사는 것에 지쳤고 무대에 오르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요로 무대에 올라야 했고 일단 무대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청중의 열광을 끌어냈다.
 
아버지의 강압과 원치 않는 연주 여행은 그를 피곤하게 했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겹쳐 어린 리스트는 쇠약해졌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복과 휴식을 위해 같이 온천을 찾았는데, 온천에서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아버지를 묻고 돌아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때 리스트는 16세였고 이것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어린 신동의 모습을 벗은 리스트는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았다. 우선 그는 연주 여행에 매여 공부가 부족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의무도 생각했다. 어머니와 파리에 정착해서 살기로 한 그는 생계를 위해서 레슨을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파리의 이곳저곳을 돌았다. 그리고 틈틈이 책도 읽었다. 독서량이 많았던 그의 장서(藏書)는 수천 권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사춘기를 거치며 몇 차례 격정적인 사랑에도 빠졌다. 그때마다 정신적으로 큰 방황을 했고 곁에 있는 어머니가 그를 보살펴 회복할 수 있었다. 한동안 종교와 문학에 빠져 책에 몰두하기도 했던 그는 20세 전후에 여유를 찾았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 청년 리스트는 문인, 화가, 음악가들과 교류의 폭을 넓히며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리스트의 음악 모임. 왼쪽부터 요세프 크리후버(화가), 베를리오즈, 체르니, 리스트, 하인리히 에른스트. 크리후버 그림, 석판화. 1846.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리스트의 음악 모임. 왼쪽부터 요세프 크리후버(화가), 베를리오즈, 체르니, 리스트, 하인리히 에른스트. 크리후버 그림, 석판화. 1846.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부모의 음악적 배경, 아버지가 이끈 교육의 방향, 체계적 음악 교육의 유무, 아들의 재능을 활용하는 아버지의 방식, 가족이 갖는 의미와 집안 분위기 등 많은 것에서 리스트는 쇼팽의 경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쇼팽의 어린 시절과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 5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쇼팽과 리스트는 둘이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았다. 리스트는 섬세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와 시심(詩心)이 가득한 그의 곡을 높이 평가했다. 쇼팽은 리스트가 갖지 못한 충실한 내용물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손가락의 기계적 훈련을 목적으로 하면서 예술성까지 갖춘 쇼팽의 연습곡에 열광했다. 때문인지 그의 작품번호 10번 연습곡은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리스트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을 가진 쇼팽의 파리정착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둘을 비교할 때 대중적인 인기는 리스트가 확실히 앞섰다. 베를리오즈는 “리스트는 파리에서 무조건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예술가이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게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리스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노출되었었다. 남자다운 외모에 강렬한 피아노 음향, 화려한 기교와 무대를 사로잡는 카리스마까지 청중의 열광을 끌어내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대규모 청중이 있는 공연은 음미할 수 있는 것보다 쇼(show) 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리스트는 장식과 극적인 효과로 눈요기를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서면 그는 연주에 앞서 장갑을 객석으로 던졌다. 여인네들은 그 장갑 쟁탈전을 벌였고 연주 시작 전부터 청중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그러고 나면 피아노를 망가트릴 정도로 열정적인 연주를 했다. 그의 멋진 용모와 화려한 제스처에 청중은 매료되었다.
 
그는 연주 홀뿐만 아니라 부두, 공장용지, 항구 등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청중이 있는 어떤 곳이든 가서 음악을 들려주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인지 한순간의 흥을 주는 쇼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1841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연주회에는 3000명의 관객이 몰렸다. 유럽 전역에서 형성된 그의 열광적인 팬덤을 하인리히 하이네는 리스토매니아(Lisztomania)라고 불렀다.
 
37세의 프란츠 리스트. Miklos Barabas 그림, 1847, 헝가리 국립 미술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37세의 프란츠 리스트. Miklos Barabas 그림, 1847, 헝가리 국립 미술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리스트는 동반 연주자 없이 혼자서, 그리고 암보로 모든 연주회 프로그램을 소화한 최초의 연주자였다. 원래 연주회는 ‘콘서트 concert’라고 불렸다. ‘Con-‘은 ‘함께’의 의미가 있는 접두사이다. 리스트는 그의 연주회를 ‘리사이틀 Recital’이라고 불렀다. 이 말에는 ‘암기’의 의미가 들어있다. 리스트 이후로 그 말은 독주회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쇼팽과 리스트를 작곡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비교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두 사람은 비교 자체가 안됐다. 이 점에서 쇼팽은 리스트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리스트는 열등감을 가졌다. 젊은 시절, 쇼팽과 멘델스존은 리스트를 각각 ‘미스터 제로(Zero)’, ‘음악 한량 music dilettante’이라고 놀렸는데 이는 그때까지 의미 있는 곡을 쓰지 못했다는 것과 깊이는 부족하면서 음악을 그저 자신을 빛내는 장식처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젊었을 때는 그의 곡에 대한 평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리스트는 한때 자신의 곡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뒷날에는 중요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곡이거나, 자신의 혹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중과 달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쇼팽 쪽으로 가는 점수가 높았다.
 
쇼팽과 비슷한 시기에 파리로 와서 그곳에서 활동하며 리스트가 말했던 ‘낭만파 형제들’과 자주 어울렸던 하인리히 하이네는 “어떤 피아니스트도 리스트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상실된다. 하지만 쇼팽만은 예외인데 그는 피아노로 영혼을 치유하는 천사이다.”라고 하였다. 미켈 부르즈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리스트는 강렬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쇼팽은 시끄러운 방식이 아니라 보다 섬세하고 다정하게 마을을 울린다.”
 
장식이 배제되고 본질적인 것만 다루는 쇼팽의 음악은 조용히 음미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리스트와 달리 쇼팽은 ‘정제’된 곳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품위 있는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을 앞에 두고 한 사람 한 사람과 얘기하듯이 연주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한 분위기와 환경은 부유한 귀족의 거실에 마련된 살롱이 제공했다. 당시의 살롱 문화는 쇼팽을 위한 시대 배경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의 가치를 밝혀준 살롱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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