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부패와의 전쟁 선포”…칼 빼든 김정은

대북제재 속 비리 척결 고삐 당기는 이유는
북한이 지난 2월 발행한 신년사 기념 우표의 모습.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부정부패 단속에 나섰으며 김정은도 지난 12일 시정연설에서 비리척결을 강조하는 등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2월 발행한 신년사 기념 우표의 모습.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부정부패 단속에 나섰으며 김정은도 지난 12일 시정연설에서 비리척결을 강조하는 등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말 대사전』(2017, 사회과학출판사)은 ‘부패’란 단어를 ‘정치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변질하여 못쓰게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예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통치배’라고 사례를 들거나 ‘<슬픔의 노래>라는 말 속에는 왕궁은 부패하고 백성들은 슬프다는 뜻이 들어있다’는 쓰임새 보여주기에서는 부패 행위가 봉건 시대의 유물이란 뉘앙스가 담겨있다. 이 사전은 ‘비리’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도 ‘역대 봉건통치배들은 온갖 비리와 사기협작으로 부정축재한 모든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여 왔다’며 권위주의 정부나 서방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북한의 요즘 내부 사정은 사전 속 모양새와 달라 보인다. 부정부패나 비리는 딴 세상 얘기라고 하기에는 북한 내부의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12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이 문제를 챙기고 나섰다. 집권 8년 차를 맞아 새 권력 진용을 짠 최고인민회의 14기 첫 회의 시정연설에서 그는 부정부패의 폐해를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국가 존망과 관련되는 운명적인 문제로 내세우고 그와의 단호한 전쟁을 선포했고, 강도 높은 투쟁을 벌이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경제와 대외문제,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향후 구상을 밝히는 자리에서 치부라 할 수 있는 간부들의 비리와 부패 이슈를 꺼내 ‘전쟁 선포’란 표현까지 동원하며 직격탄을 날린 건 이례적이다. 대북 정보를 다루는 관계자와 소식통들이 전하는 다음 경우를 살펴보면 김정은의 고민이 짐작된다.
 
사례 #1. 북한 최고의 공안기구인 국가보위성 국장급 인사가 지난달 부하 간부 2명과 함께 중국 랴오닝성 지역으로 탈북해 잠적했다. 소장(별 하나의 장성급으로 우리 군의 준장에 해당) 계급인 이 보위성 국장은 평양에서 거액의 달러를 챙겨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던 부하들이 비밀계좌로 비자금을 만들어 온 게 보위성 검열에 적발된 것과 연관된 탈북이란 관측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보위성 간부 일행의 행방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보위성과 호위국 요원 등으로 짜인 체포조를 동원해 추적 중”이라고 귀띔했다.
 
#2. 지난해 말 김정은과 그 일가의 경호를 책임진 호위국 산하 연못무역회사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횡령 및 축재 사건이 드러났다. 해외 판매자금을 조작하고 외국 업체로부터의 리베이트, 간부 승진·보직은 물론 자녀들의 해외 일자리를 봐주면서 챙긴 뇌물 등 규모가 2000만 달러(우리 돈 227억여 원)에 달했다고 한다. 검열 결과를 보고받은 김 위원장이 “어떻게 됐길래 한 단위에서 이렇게 많은 달러를 빼돌릴 수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김정은

김정은

김정은을 격노하게 한 북한 핵심층의 부정부패 문제는 상황이 꽤 심각해 보인다는 게 한 고위 탈북 인사의 전언이다. 평양 권력의 중심부에선 ‘연못에서 퍼지기 시작한 파문이 심상치 않다.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이 인사는 “연못무역회사에서 발단이 된 중앙기관 부패 현상에 대한 노동당 검열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압박감을 느낀 간부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가족들까지 동반해 도피·탈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나 산하 무역기관의 부정부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내리막길을 걷던 북한 경제가 김일성 사망(1994년)과 이어진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면서 파국에 이르렀고, 파벌이나 기관·기업소 간의 경제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 치열해졌다. 시멘트나 철근·중장비 같은 물품뿐 아니라 군부대의 전투 장비나 식량까지 빼돌려졌다. 공장가동률이 25% 수준을 밑도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원자재를 훔치거나 헐값에 넘기고, 아예 공장설비를 내다 파는 경우까지 생겼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직장을 결근하거나 중국 쪽으로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지배인이나 경비병에게 돈이나 물품을 주는 건 일상이 됐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탈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데 따르면 ‘북한에서 살 때 수입의 20% 정도를 뇌물로 바쳐야 했다’고 답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 정도면 뇌물이 북한 경제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지난해 7월 발표한 국제부패지수에서 북한이 조사대상 180개 국가 가운데 171위를 한 것도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절 북한은 비리나 부패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의 경우 군부나 노동당이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존하고, 그 과정에서 이권을 챙기는 걸 용인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혁명 2~3세대로 불린 빨치산·고위층 자제들이 장악하고 있는 돈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모양새를 취했다는 것이다. 무기판매 대금 등을 챙겨 탈북한 사건이 발생해도 쉬쉬하고 넘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서방 근무 중 가족과 함께 탈북·망명한 간부가 가져온 거액의 달러를 북한 당국이 남북회담 비공개 접촉 과정에서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해온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대응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중대한 비리나 부정부패 사건이 생기면 이를 철저히 파헤치고 관련된 기관이나 개인으로 수사 범위를 넓혀 나간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내용이 핵심 간부 사이에 공유되고 학습제강(비공개 사상교양 자료) 등을 통해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알려진다.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정은은 고모부에게 ‘국가전복음모’ 죄를 씌웠고 군사재판 판결 당일 사형에 처했다. 북한은 관영매체를 통해 장성택이 수천억 원의 북한 돈을 남발했고, 460만 유로 (현재 환율로 우리 돈 59억여 원)를 해외 도박장 등에서 탕진했다고 구체적 비리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북한 매체들은 최근 들어서도 부정부패 척결 목소리를 꾸준히 높여왔다. 연못무역회사 비리가 내부적으로 불거진 지난해 12월 10일자 노동신문은 “우리 당은 세도와 관료주의를 일심단결을 좀먹는 위험한 독소로, 적들을 도와주는 이적행위로 보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강조했다.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서 ‘걸리면 끝장’이란 위기의식이 고위 간부 사이에 번진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적행위로까지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어 긴장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비리 혐의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집에 숨겨둔 거액의 달러가 발각될 경우엔 탈북하거나 해외로 망명하려 한 것으로 간주되는 등 처벌 수위도 높아졌다. 북한을 움직이는 ‘권력 중의 권력’으로 꼽히는 노동당 조직지도부도 예외가 아닐 정도다. 2017년 초 최용해가 책임자로 있던 조직지도부는 김원홍 보위상의 부패·월권 행위를 조사해 낙마시켰다.
 
부정부패를 손보겠다며 김정은이 빼 든 칼날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불투명하다. 만성적인 경제난 속에  노동당과 군부·내각은 물론 장마당에서 부를 축적한 신층자본가 ‘돈주’까지 엉킨 먹이사슬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더욱이 미국과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압박수위는 북한 경제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외화벌이 루트가 끊기고 원자재 수입 등이 차단된 북한의 기관·기업소와 간부들에게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비리 단속의 고삐만 당겨질 경우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제재 장기화에 따라 챙길 돈이 줄고 살림살이가 빠듯해진 권력층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김정은이 사정 국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