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LO 협약 논란 뜯어보기 <上>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둘러싼 노사정 논의가 소득 없이 15일 끝났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노사 간 충돌은 더 격해질 전망이다. 논의 내용이 국회로 넘어가면 정치권의 대립과 파열음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어서 여당으로선 그냥 흘릴 수가 없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경제충격 등을 이유로 비준에 부정적이다. 내년 총선이란 대형 정치 일정이 있는 상황에서 대결을 피하고 미룰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바탕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ILO 핵심 협약은 8개다. 아래 <표>에서 보듯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금지, 균등대우, 아동노동금지와 관련된 협약이다. 한국은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금지와 관련된 협약을 제외한 4개를 비준했다. 미국은 2개만 비준했다. 일본은 자국법과 충돌하지 않는 6개를 비준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28개 회원국이 8개 협약을 모두 비준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뒤떨어진 건 사실이다. 한국은 1991년 ILO의 152번째 가입국이 됐다.

ILO 핵심협약 비준 현황
◇결사의 자유 관련 협약
제87호와 제98호다. 두 협약은 서로 연결돼 있다. 노조를 결성할 자유와 파업과 같은 쟁의행위를 포함한 단체행동권의 원활한 행사를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노총도 이듬해 "현 국내외 노동현실의 문제점을 고려해 ILO 협약 제87호 및 98호의 비준은 가입 후에도 상당기간 유보되어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조건없이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금과 사뭇 다르다.
두 협약에 따르면 실업자와 해고자, 공무원 등 누구나 노조를 결성하고 가입할 수 있다. 실업자나 해고자도 자신이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 임금이나 단체협약 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현재는 노조법 제2조에 의해 이게 불가능하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국가 기간시설에서 파업이 발생할 경우 필수 인원을 배치해 가동 중단만은 막으려는 조치가 필수유지업무제도다. 그런데 ILO는 한국이 너무 많은 필수 인원을 배치한다는 입장이다. 파업 효과를 떨어뜨리는 행위로 ILO 협약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파업이 장기화하거나 심각한 양상으로 번질 경우 정부가 취하는 긴급조정제도도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협약 위반으로 걸리지 않는다.
5급 이상 공무원의 노조 설립 제한이나 교원노조의 설립과 운영, 공무원이나 교원의 쟁의행위와 정치활동 금지, 집회 참석자에 대한 징계 등을 규정한 국내법도 모두 협약 위반이다.

ILO 총회 장면
◇강제노동 관련 협약
제29호와 105호 협약을 이른다. 흔히 강제노동이라고 하면 사람을 몰래 가둬놓고 혹사하는 것을 연상하기 쉽다. 이런 행위는 국내에서도 불법이므로 협약 비준과 별 상관이 없다. 한데 이 협약은 그런 범주를 규율하는 게 아니다.
제29호 협약은 의무 군 복무, 교도소 내 강제근로, 비상시 강제근로 등을 제외한 강요에 의한 노동을 모두 강제근로로 본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ILO는 이집트와 터키가 군대에 필요한 인원을 초과한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한 사례에 대해 29조 위반이라고 판단했었다.
또 ILO는 2007년 8월 한국의 공익근무에 대한 질의 회신에서 "협약 적용 제외 대상이 아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협약 위반이란 얘기다. 29호를 비준하려면 대체복무제를 폐지해야 하는 셈이다.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근로도 교도관의 관리하에 교도소 안에서 관영작업을 하는 것 이외에는 강제노동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외부 회사로부터의 도급이나 위탁작업, 외부 통근작업 등은 협약상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재소자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고, 재범률을 낮추기 위한 제도마저 없애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파업에 따른 업무방해죄나 체포와 같은 행위 또한 협약에 반하는 제도다. 합·불법 파업을 막론하고 노역을 수반하는 징역형은 강제근로 금지 협약에 배치된다. 선원법, 전기사업법, 경비원법, 청원경찰법 등에 포함된 징역형 처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파업에 따른 제재는 손해배상과 같은 민사나 회사의 징계 정도만 인정된다.
이처럼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국내법의 상당 부분이 미비준한 ILO의 4개 협약과 상충한다. 한국이 협약 비준을 미루고, 주저한 이유다. 비준에 앞서 이런 조항들을 정비해야 법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