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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아내 담당? 은퇴자여 그런 분업 이젠 끝났다오

기자
박헌정 사진 박헌정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5)
요즘 가끔 은퇴에 대한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은퇴 후 생활을 글로 쓰다 보니 은퇴자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은가 보다. 불러내서 역할을 부여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은퇴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은퇴자의 요리실력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흘렀다. 굳이 ‘요리’까지는 아니어도 은퇴자는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남자 은퇴자의 이야기다.
 
두부 조림 만들기. 굵은 소금을 쳐서 두부의 물기를 빼고 들기름과 식용유에 부쳐서 당근, 양파, 마늘, 간장, 물엿 등과 조린다. [사진 박헌정]

두부 조림 만들기. 굵은 소금을 쳐서 두부의 물기를 빼고 들기름과 식용유에 부쳐서 당근, 양파, 마늘, 간장, 물엿 등과 조린다. [사진 박헌정]

 
나의 할머니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 새 장가를 들려고 하셨는데 워낙 시골 마을이라 여의치 않았는가 보다. 전에는 ‘손자도 보신 분이 그 연세에 새 장가를?’ 생각했는데 어머니 말씀을 듣고 이해되었다.
 
그 시절에는 집안에 여자가 없으면 밥을 끓여 먹을 방법이 없으니 그러셨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전기밥솥이나 가스레인지가 있나, 즉석식품이 있나, 남자는 바깥에서 농사일해야 하는데 불씨를 간수할 수도 없으니 아주 힘드셨다고 한다. 남자들의 부엌 아궁이 접근이 쉽지 않던 때였다.
 
굳이 그 시절과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다행히 나는 음식을 만들 줄 안다. 막내로 자라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뭘 하시든 유심히 쳐다본 게 있고 자취 경험도 있다. 창의적인 재료 배합으로 냉장고의 오래된 재료를 처분할 때마다 아내가 좋아한다.
 
요리학원도 넉 달 정도 다니며 기본을 다졌더니 반찬, 국, 찌개 같은 생활 속 음식을 만드는 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러면서 요리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특히 은퇴자는 사회나 가정에서 새롭게 변한 위치를 파악하고 재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조리’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요리학원 수업시간에 만든 소고기 콩나물밥. 집에 와서는 소고기 대신 바지락살을 넣고 해봤더니 더 맛있었다. [사진 박헌정]

요리학원 수업시간에 만든 소고기 콩나물밥. 집에 와서는 소고기 대신 바지락살을 넣고 해봤더니 더 맛있었다. [사진 박헌정]

 
사람에게 밥처럼 중요한 게 있을까. 서글프고 치사하고 모욕적인 말 ‘삼식이’ 역시 ‘밥(食)’에서 비롯되었다. 식사를 스스로 해결 못 하고 때만 되면 아내를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의 입장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도 일주일 정도 밥 당번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이건 안 해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도무지 자유가 없다. 밥 시간이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똑같은 것만 먹을 수도 없고, 할만한 것은 의외로 적고, 받아먹는 입장에서는 아무 생각 없고…
 
아내가 곰탕을 한 솥 끓여놓으면 불안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정말 한 솥 끓여놓고 먹든 말든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겠다. 한 사람의 어정쩡한 자유가 반려자의 구속으로 이어지다니! 그러니 얻어먹을 때도 좀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음식은 거저 나온다고 생각하고, 자극적이고 기름진 바깥 음식에 길들여진 남편들의 반찬 투정도 평생 간다.
 
음식은 정성이라면서도 정작 그 정성의 출처는 생각하지 않는다. TV의 먹방이나 요리프로그램을 생각해보자. 방송이다 보니 대표적인 장면만 보인다. 연예인이 나와서 불 위에서 화려하게 웍을 채가며 볶아대고, 빠르게 칼질을 한다. ‘개인기’의 일환이지만 요리를 배워본 나로서는 ‘저 재료는 누가 준비했지? 채는 이미 썰어놨네. 설거지는 누가 하지? 막내 작가 몫인가?’ 하며 보게 된다. 엄청난 수고가 누군가의 손끝에 숨어 있다. 집에서는 누구인가.
 
그 수고를 좀 나눠보자. SNS에 요리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이 많다. 나도 가끔 올리다가 주변 지인들의 타박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런 모습 보여주면 자기들만 집에서 더 들볶인단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은퇴자나 은퇴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일단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일없이 밖에 나가 혼밥 하거나 아내 없는 집에서 맨날 똑같은 ‘락앤락 정식’이나 라면으로 때우는 궁상은 보기 딱하다. 업그레이드하자.
 
혼자 만두를 빚어보았다. 만두피를 밀고 재료를 다져 준비하고 만드는 것까지, 혼자 하기에는 공정이 좀 많았지만 재미있었다. [사진 박헌정]

혼자 만두를 빚어보았다. 만두피를 밀고 재료를 다져 준비하고 만드는 것까지, 혼자 하기에는 공정이 좀 많았지만 재미있었다. [사진 박헌정]

 
처음부터 ‘요리’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매번 ‘작품’을 만들 필요도 없다. 넘치거나 타면 불 줄이고 짜면 물 붓고 싱거우면 간하면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는다.
 
감자채 볶음, 계란찜, 미역국 정도는 식용유와 간장, 소금 정도만 있으면 당장 시작해볼 수 있다. 여기에 참기름, 물엿, 굴 소스, 맛술 같은 것들의 용도까지 이해하면 메뉴가 훨씬 늘어난다. 라면을 먹더라도 냉장고 뒤져서 양파, 파, 당근, 양배추, 버섯, 두부, 냉동 새우, 콩나물 같은 걸 조금씩 넣어보자.
 
레시피는 인터넷에 다 나온다. 음식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가족들이 먹는 모습에서는 보람도 느껴진다. 요리가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지금껏 그냥 지나쳤던 재료들도 다시 보일 것이다. 그 정도는 해놓고서 아내와 ‘가사분담 협상’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
 
‘식량’이 생활 속에서 소비되는 작고 구체적인 단위가 ‘음식’이다. 식량 상태로 생쌀을 씹든 밥을 지어 음식으로 먹든, 먹는 것은 한 단위의 인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가장 원초적이고 지속적인 일이다. 그것을 분업화해서 한 사람의 ‘단위업무로 분장’해 놓은 게 가정이다.
 
은퇴는 직장과 가사로 나누었던 모든 분업체제가 끝났음을 뜻한다. 밥은 아내가 아니라 누구든 먹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립은 식생활에서부터다. 아내도 처음부터 100% 완벽해지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시작해보자.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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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