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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제암리·고주리 만행으로 돌아 본 100년 전 4월 화성의 비극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장날은 맞아 거리로 나온 1000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곧 일본 경찰과 충돌했다. 맨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홍면옥(아명 홍면, 1884~미상) 지사에게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총을 쐈다. 홍 지사가 쓰러지자 화가 난 군중들은 돌과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 노구치 순사부장을 숨지게 했다. 
 
3일 뒤인 3월 31일 화성시 향남면 발안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1000여명의 주민은 일본인 소학교와 우편국,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이날 이들을 이끌던 이정근(1856~1919) 선생이 일본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졌다.
지난 3일 개통한 화성 3.1운동 만세길. 우정.장안 만세 운동이 벌어진 31㎞ 행선지를 길로 만들었다. [사진 화성시]

지난 3일 개통한 화성 3.1운동 만세길. 우정.장안 만세 운동이 벌어진 31㎞ 행선지를 길로 만들었다. [사진 화성시]

 
3일이 지난 4월 3일,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 주민 2500명이 만세 시위에 나섰다. 주곡리를 출발한 만세 꾼들은 석포리와 수촌리를 지나 어은리에 있던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조암리에 있는 쌍봉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고 독립 의지를 다진 이들은 우정면사무소를 불태우고 화수리 경찰주재소를 습격했다. 이들이 이동한 거리만 31㎞. 건장한 성인 남성이 걸어도 하루가 꼬박 걸릴 거리다. 이혜영 화성시 독립기념사업팀 학예사는 "화성지역 만세운동은 종교계와 농민은 물론 일부 면장 등까지 합세하는 등 전 계층이 참여한 민중·거족적 운동이고 일본의 무단통치와 강경 진압에 맞서 싸운 공세적 저항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화성 '만세 운동'에 일본 탄압 집중 
하지만 이들 독립운동으로 화성은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발안 장터 만세시위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일본군이 경기도 장관과 수원 군수 등을 통해 군대를 지원한 것이다. 우정·장안 만세운동 하루 전인 2일 경성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자와 대자와 경기도 경무부 경시 하세베 대위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순사로 구성된 대대적인 검거반이 조직됐다. 11일 뒤엔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육군 보병 부대도 검거반에 가담했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뒷편에 학살장소였던 제암교회(당시 제암리교회)가 보인다. 기념관은 화성지역 독립운동사의 산 교육장이다. [중앙포토]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뒷편에 학살장소였던 제암교회(당시 제암리교회)가 보인다. 기념관은 화성지역 독립운동사의 산 교육장이다. [중앙포토]

화성지역 일본군 학살사건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제암리·고주리 사건'이다. 
100년 전인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중위는 향남면 제암리의 예배당으로 15세 이상 남성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 문을 부수고 뛰어나오는 사람들은 사살했다. 남성 21명과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을 하던 여성 2명이 살해됐다.
 
이들의 만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들은 인근 고주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 지역은 발안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의 전도실이 있는 동네였다. 이들은 김홍렬 선생 일가족을 살해한 뒤 불태웠다.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년)가 현장 사진을 찍고 '일본군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이런 공로로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기도 했다.   
 
제암·고주리보다 앞선 화성 지역 학살들
일본에 의한 화성 학살 사건은 그 이전부터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로 이뤄진 1차 검거반은 4월 6일 수촌리를 포위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 6~17일 불에 탄 가옥만 345곳, 46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또 379명이 붙잡혔다. 우정·장안 만세 운동을 이끈 송성호 선생의 손자 송학섭(85·화수리)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할아버지께서 왜놈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만세운동 후 쳐들어온 일본군들 때문에 동네가 모두 불탔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1982년 있었던 제암리 학살 만행 유해 발굴 현장 [사진 화성시]

1982년 있었던 제암리 학살 만행 유해 발굴 현장 [사진 화성시]

 
주민들이 일본 경찰을 처단한 화수리 주재소는 현재 화수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정문 앞에는 그 날 시위대의 행적을 알리고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안내판이 설치돼있다. 화성시는 지역 내 가장 큰 항쟁이었던 우정·장안지역 31㎞ 구간을 '만세길'로 정비해 지난 3일 개통했다. 최진성 선생의 손자 최병헌(66·한각리)씨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가 3·1운동을 주도하고 도피한 사이 일본군이 우리 집은 물론 동네 곳곳에 불을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불을 끄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일 개통한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걷는 서철모 화성시장과 시민들. [사진 화성시]

지난 3일 개통한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걷는 서철모 화성시장과 시민들. [사진 화성시]

15일 제암리에서 학살사건 추모제
화성시는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섰다. 주민 상당수가 참여한 만세운동과 일본의 학살 등 만행이 집중됐는데도 독립운동가 156명 중 36명은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혜영 학예사는 "연구자료도 부족하고 추서 자격 조건 미흡 등으로 독립운동을 하고도 추서를 받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지역 독립운동가가 너무 많다"고 설명했다. 화성시는 독립운동 성지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 역사문화공원과 독립운동기념관 조성을 추진할 예정이다.
15일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에서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추모제가 열린다.
 

화성=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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